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7장
지금으로부터 27억년 전까지 지구는 꿈틀대지도 않았다. 무시무시한 열로 들끓고 있었지만, 지각운동이 없었기에 그저 열받은 수박과도 같았다. 한 번씩 참지 못할 정도로 열받는 일이 있으면 그저 마그마를 땀처럼 흘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최초의 빙하기가 찾아왔다. 차갑게 식은 대기가 땅 위로 스며들었을 때 맨틀은 드디어 온도 차에 의해 지각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19억년 전 최초의 초대륙인 누나(NUNA)가 만들어졌다. 이름만큼 친숙했으면 좋겠지만 재미있게도 이 녀석의 또 다른 별명은 어떤 의미에서 압도적이다. ‘지루한 10억년(Boring Billion)’.
차살림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차수건과 함께 한다. 자리수건을 펼치면서 본격적인 차살림을 시작하고, 자리수건을 접으면서 마무리 짓는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닦음 수건이 맹활약한다. 이것저것의 숨은 물기를 찾아 닦아내고, 때로는 자리수건 위로 떨어진 찻물을 남들이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훔쳐내는 일에도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이리저리 날고 기어도 우리는 사람이고 저것은 차이기에 노란 찻물 자국이 생겨버리고 만다. 아아 이 가엽고 어리석은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찻물이 진 자리수건과 닦음수건을 가만히 펼쳐 들고 나는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동다살림법에서 차수건은 어째서 하얀색인가. 게다가 어째서 면이어야 하는가. 관리 면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차와 상극이다. 차는 대놓고 염색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염과 오염이라는 면에서 강력하다. 한 번 물들면 빼내기 힘들다. 그것이 면처럼 흡수를 잘하는 대상이라면 그 능력은 극대화된다. 그런데도 창안자는 ‘하얀색’과 ‘면’의 조합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장하고 가르쳤다. 물론 상상할 수 있다. 저 조합이라면 아름다움을 흥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다. 저번 절기에서 쓴 것처럼 무한의 상상력을 덧칠할 수 있는 훌륭한 배경이 되어줄 것이다. 보기에 좋으니 친해지기도 쉬울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것도 불편하면 아무 소용없지 않을까 싶은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그저 보기 좋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일종의 불편함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지구가 최초의 초대륙 누나였던 18억년 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땀 흘리는 수박일 뿐이었던 지구가 화산활동이 활발해지고 빙하기와 간빙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역동적인 몇억년을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지구에 빙하기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8억년 전까지 약 10억년 동안 지구는 얼었다 녹았다 하는 일 없이 그저 아무 일 없이 시간만 흘렀다. 과학자들은 아무도 그 이유를 명확하게 답하지 못한다. 몇몇 가설과 이론들이 존재할 뿐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지구는 꿈틀대며 지각운동을 반복했고, 바다는 황화수소로 가득 차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진핵생물이 등장해 살아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다른 일이 없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직장으로 출근했다 퇴근해서 저녁 먹고 쉬다가 잠드는 일상의 반복이랄까. 파티도 없고, 이벤트도 없고, 데이트나 술자리도, 기념일도, 축하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는 365일의 10억 반복 같은 날이었다. 지구는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노화하고, 생존하고, 진화하며 종의 변이와 다양성을 확보했지만 그럴 일이 없으니 그저 그런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왔다. 8억년 전의 일이었다. 최초의 초대륙이었던 누나가 지각 활동으로 로디니아로 이름을 바꾼 지 고작 2억년 뒤의 일이었다. 그동안 응축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마그마가 지각 위로 솟아올라 현무암 대륙을 만들어냈고 이산화탄소를 대량으로 흡수하며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캐나다 북서부의 대규모 화산폭발로 대기가 태양열을 가려 냉각을 가속했다. 그렇게 촉발된 빙하기는 두꺼운 얼음판을 만들어 냈고 현무암을 뒤덮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마그마는 이산화탄소를 분출해 냈고 현무암이 이를 흡수하지 못하게 되자 온실효과가 일어나며 온 세상의 얼음은 다시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구 최초의 생명 폭발의 현장이었다. 광합성세균들은 빠른 속도로 산소를 만들어 냈고, 미처 스며들지 못했던 바다의 깊은 곳까지 산소가 녹아들어 갔다.
10억년의 침묵은 과연 정말로 지루하기만 했던 시간이었을까. 차수건의 얼룩을 빨아서 지우고, 다시 쓰다 지우는 일의 반복이 그저 아무 일 없이 시간만 허비하는 지루한 일상의 복사면 같은 것일까. 차수건을 빨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이로운 사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선 차수건은 무척 조화로운 도구라는 점이다. 두루두루 어울리는 바탕을 지닌 물건이야말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좋은 물건이다. 아울러 무엇과 어울려도 자신의 바탕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또한 차수건의 감은 언제나 내가 이를 다루면서 손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마도 인류와 함께해 온 오랜 문화적 결과물만이 줄 수 있는 감각일 것이다. 빨래는 하는 과정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 이것은 외부적인 필요에 의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얀 광목천을 준비해서 번거로움을 마주할 이유가 없다. 마치 요플레 뚜껑을 핥지 않고 버리는 과시처럼 과시를 위한 준비라면 비싸고 으스댈 도구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이는 오로지 나를 통해, 나를 위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마주하는 도전정신이다. 마치 정화를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프란시스코 수도사의 기행처럼 쓰고 얼룩진 빨랫감을 빨아 쓰는 반복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에 나만의 만족을 위해서만이 가능한 멋진 사치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배우기로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피상적인 멋진 말과 문구로 남을 속이고 꾈 수는 있지만 그가 진정 더 높고 먼 곳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그런 것들로 어떤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동다살림법은 행동을 통해, 반복을 통해 보다 먼 곳을 응시하는 연습을 권한다. 펄펄 끓는 물에다 삶아 빠는 차수건을 바라보면서 10억년의 응축과 기다림으로 만들어진 이 멋진 지구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그렇다. 지루함은 보다 멋진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지루함의 한 가운데에는 견딜 이유가 충분한 무언가가 있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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