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새로운 여행 : 김종훈 작가를 만나다
굽 없이 편안히 놓인 바닥 위로 완만하게 차오르는 태가 아름답다. 매끈하게 감아 떨어지는 전과 그 온전한 둘레의 선은 마치 순례자가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묵묵히 걷는 듯하다. 한참 보고 있어도 불안함이 스미어 눈을 돌리게 되는 일 없이 편안하다. 색도 그러하다. 유백(乳白), 우윳빛과 휘감아 흐르는 구름의 빛깔을 한데 섞은 듯하다. 서양 사람들은 백자를 더러 하얀 금이라 불렀다는데, 반짝이는 듯 반짝이지 않는 이 보듬이를 보면 금에 비교해서는 성에 차지 않으리라. 그저 흰색 도자기가 아닌, 백자. 이 백자 보듬이는 가야산을 품고 있다.
1989년, 전통 도예에 매혹된 청년 김종훈은 틈만 나면 좋은 흙이 난다는 옛 가마터를 찾아다녔다. 가야산 백운동 어느 기슭에 이르렀을 때, 청년은 운명처럼 그 흙을 만났다. 희뿌연 흙먼지가 날리고, 정으로 돌 깨는 소리, 흙 파는 둔탁한 소리가 어지럽다. 그 아래로 크고 작은 토굴이 수도 없이 펼쳐져 있다. 곡괭이로 굴을 파고, 한 사람이 들어가 작은 칼, 큰 칼, 좁은 칼, 넓은 칼로 흙인지 바위인지 언뜻 보면 알 길 없는 무더기들을 통째로 썰고 파낸다. 한 굴의 칼 작업이 며칠에 걸쳐 이뤄지고 나면 사람들은 그 굴에서 빠져나와 입구서부터 다시 아래로 파고 내려간다. 그러다 적당한 흙무더기 색깔이 나오기 시작하면 다시 가로로 굴을 파고 들어간다. 그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파낸 것은 금이 아니다. 은도 아니고, 보석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백토다.
칼 작업을 마친 일꾼들은 그 새하얗고 질 좋은 백토를 광주리에 담아 쌓았다. 광주리가 더미가 되고 더미는 트럭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 흙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작업자들의 대답은 퉁명했다. “일본으로 가지.” 가야산 성주 자락의 백운동 백토는 한국에서 쓰일 일이 없어 일본으로 팔려나가는 중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백자는 공장토 일색이었다. 귀찮은 부수 작업도 필요 없고, 쉽게 조형이 가능하고, 파손도 덜한 데다 가격도 저렴하니 작가들 입장에서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공장에서 만든 흰색 컵처럼, 말끔한 흰색의 도자기는 세련되지만 특별하지도 않은 그릇이 되었다. 백자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김종훈 작가는 그 백토를 돈 모이는 대로 조금씩 조금씩 사 모았다. 이윽고 그는 그 흙이 묻힌 가야산 품 안에 터를 닦고 가마를 지었다. 1991년, 그는 가야산 백토로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해발 천 사백 미터에 달하는 가야산 남쪽으로는 합천과 고령이 있고, 북쪽으로는 성주가 있다. 가야산의 북쪽 가파르게 떨어지는 중턱에 심산요가 있다. 꼭대기 칠불봉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다. 초파일이면 사람들은 가야산 바로 반대편에 있는 해인사로 가기 위해 심산요를 지나 코박이재를 건넌다. 비 오고 개는 날이면 구름이 경주하듯 달리며 봉우리들과 산기슭을 쉴 새 없이 훑고 지나며 사람들의 신비감과 경외심을 자극한다. 산기슭에 얹힌 듯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깊은 산골에 숨은 가마다.
심산요 작업실 주변은 온통 흙이다. 도자기 몸흙이 되고 유약이 될 사질토와 백토가 곳곳에 묻히거나 드러나 있다. 아예 땅속 깊이 묻힌 흙부터 비 맞고 볕 쬐게끔 드러내놓은 흙까지, 언뜻 그저 산자락 흙인 듯 보이지만 어느 한 덩이 작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다. 얼마나 묵었고 숙성되었는지에 따라 조금 더 뿌옇거나 조금 덜 거칠고 덜 붉거나 황토처럼 상기되어 있다.
성주 방면의 흙은 백토나 사질토 어느 것이든 산청 등지의 여타 가야산 일대 흙보다 냄새도 덜하고 강도가 좋았다. 물론 강도가 좋다고 모두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고온의 장작 가마에도 잘 견디는 성질은 반대로 가마에서 나와 식히는 과정에서 균열이 쉬이 일어났다. 게다가 점성이 적어 뭉치기도 어렵다. 묵힌 흙을 물에 보름 넘게 재우고, 분을 치고, 꼬막을 잘 밀어도 쉬이 물레를 타고 오르지 않았다. 내려 앉기 일쑤인 이 흙뭉치들을 보며 작가의 마음도 무너지곤 했다.
그의 스승, 혹은 스승의 스승이었던 옛 도공들이 백토로 꼬막 미는 이야기는 전설 같았다. 온 힘을 다해 흙 반죽을 밀어도 이야기만큼 부풀지를 않았다. 그래도 김종훈 작가는 그저 믿고 나아갔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했다. 남들이 점성 좋고 저렴한 흙을 사서 백 개를 구워낼 때 그는 가야산 흙덩어리를 갖은 방법으로 묵히고 발효시키며 수년을 보냈다. 뭉쳐지지도 않는 흙을 부숴 가루 내고 물에 삭혀 다시 꼬막을 밀었다. 그렇게 열 개를 만들면 가마에서 서너 개가 터지고, 나와서 식는 동안 또 서너 개가 금이 갔다. 친구가 백 개를 만드는 동안 너덧 점 겨우 만드는 세월을 보내며 그는 산골짜기에 사는 도인이 되어 갔다.
그러다 작가는 정동주 선생을 만났다. <우리 시대 찻그릇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소개되며 선생과 인연이 닿았다. 21세기에 갓 들어갔을 즈음, 정동주 선생은 백자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당시의 도자 풍토 속에서 가야산 백토에 매료되어 수고로움을 기껍게 감내하는 이 젊은 작가가 흥미로웠다.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스승이 숙제를 내면 제자가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정동주 선생은 우리나라 땅에서 난 흙으로 우리 시대의 정신을 미적으로 구현한 찻그릇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김종훈 작가는 그 기획에 딱 맞는 도예가였다. 작가에게는 이 땅의 흙이 있었고, 탁월한 물레 실력이 있었으며, 더딘 작업도 꾸준하고 묵묵히 해나가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보듬이가 태어났다. 두 손을 맞대어 보듬어 쥐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편안한 백자 보듬이는 김종훈 작가의 대표작이 되었다.
김종훈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흙을 이겨야 한다.” 그가 다루는 흙은 가공되지 않는 날것이다. 그저 산에 묻혀 있던 흙일뿐이다. 그 흙으로 고운 선과 빛깔을 품은 도자기 한 점을 만들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품이 들어가는지 작업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여기에 무너지면 유혹이 깃든다. 다리가 아프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지는 이치다. 그런데도 그는 찻그릇을 만드는 작가라면 흙에 지면 안 된다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다.
작가는 흙뿐만 아니라 도자기 유약 역시 자연에서 구한다. 깔끔하게 포장된 석회 가루가 아니라, 조개껍데기를 굽고 빻은 가루로 백자 유약을 만든다. 갯벌 조개도 씻어 굽고 민물조개도 말리고 굽는다. 이 땅에서 태어나 저만의 역사를 가진 자연물은 그 만의 개성과 색을 가진다. 그 자연의 힘과 색을 작가는 빌려오는 것이라 말한다. 사람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그 힘과 이치를 그릇에 담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직한 진심은 타인의 마음에 가 닿는듯하다. 김종훈 작가의 찻그릇을 사용해 본 많은 사람이 말한다. 그의 찻그릇은 편안해서, 이런저런 그릇을 두루 쓰다가도 결국 다시 꺼내 쓰게 하는 힘이 있다고.
첫 세대 보듬이 작가로서 그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수천 개의 완성되지 못한 보듬이가 그의 손에서 태어나 가마 옆에서 깨지고 흙으로 돌아갔다. 그는 보고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오로지 창안자인 선생의 말씀만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잔도 완도 아닌 걸 만들라니? 대체 어떻게? 그게 무엇이길래? 그래서 잔보다 아주 조금 크게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조금 커지니 뭔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조금 더 크게 만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크기가 커지고 굽은 낮아졌다. 여기에 그의 세 번째 원칙이 있다.
작가는 언제나 “또 만들면 되지 뭐”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책 없으면서도 멋진 말인가. 세상에는 깨져버린 그릇과 깨지길 기다리는 그릇만이 있을 뿐이다. 완성했다고 그저 창고에서 묵히는 그릇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은 그릇의 8할을 언젠가는 이윽고 깨버리고 만다. 같은 그릇을 만들고 싶어도 결코 똑같이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가마굴로 불어 들어오는 어제의 바람과 오늘의 바람이 다르듯. 좋은 작품일수록 다음에 다시 만들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미련을 버리는 연습도 중요하다.
찻그릇은 잘 빚어 저만치 두고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예술품은 미감을 자극하고 일깨우되 실용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 찻그릇은 예술품이되 쓰임새가 분명한 그릇이다. 이 때문에 차 마시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라고 평가절하당하기도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찻그릇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제한된 형태와 크기로 구현하는 추상예술이면서 쓰는 사람의 마음과 편의까지 고려해야 하는 섬세한 물건이기도 하다. 김종훈 작가는 찻그릇의 두 측면에서 한결같다. 자연스러울 것. 산과 들에 저절로 깃든 아름다움을 찻그릇에 그저 옮겨 놓을 뿐이라는 그의 손끝에서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선과 색이 나온다. 자연스러움이 곧 내 마음의 평온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쓰는 이에게도 가 닿는다는 믿음이 여기 이 백자 보듬이에 담겨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