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휘둘리지 않茶


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2장











이덕리(1725-1797)는 실학자다. 동명이인으로 무장 이덕리가 같은 시대에 살아 일본에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적이 있으나, 실학자 이덕리는 다녀온 적이 없다. 그는 족보에 이덕위로 이름이 적혀 오래간 진위를 알지 못했다. 그는 <동다기>를 지었고 많은 그 저자 이덕리를 무장 이덕리로 오해했다. 재밌게도 이 글을 부르는 이름이 많다. <동다기> 혹은 <기다> 혹은 <다기> 혹은 <다설>이라고도 부른다. <다설>은 이덕리 본인이 다른 글에서 스스로가 차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음을 말하는 대목에서 등장한 단어다. 다시 말해, 글 이름이라기보다 목적어나 지칭한 단어에 가깝다. <다기>는 편집본이다. <기다>와 내용이 같지만, 후반부 내용이 모두 탈락해 있으니 글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라 보기 어렵다. <기다>와 <동다기>는 같은 내용, 같은 글이다. 이덕리가 전라도에서 귀양살이 할 적에 지은 문집 《강심(江心)》에 여러 다른 글과 함께 실려 있다. 부르는 것은 제각각이나 나는 편의상 <동다기>라고 부르겠다. 이 글은 후대를 살았던 승려 초의의 <동다송>에서 언급하며 그 이름을 알렸고, 글을 목적이 동다(東茶)의 우수성을 피력함과 관련이 있다. 차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 우리 차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야 하므로 <동다송>과 그 운율을 맞춰 <동다기>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덕리는 실학자였기 때문에 당시의 여러 문인과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아이디어를 글로 써냈다. 《강심(江心)》에는 <상두지(桑土誌)>라는 글이 있다. 전방의 병영에서 뽕나무를 둔전하며 그 수익으로 군대의 무기와 보급물자를 보충하고 정비하자는 내용이다. <동다기> 역시 그 계획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1760년 중국 상선의 전라도 좌초 사건을 다룬다. 박제가의 《북학의》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당시 좌초한 그 배 안에는 황차(皇茶)가 가득 실려 있었다. 양이 대단히 많아 지역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고도 넘쳐 전국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그 유행이 십 년을 갔다. 그는 당시 조선에는 차를 알고 마시는 사람이 없었고 흔한 잡초로 여기곤 했으나 그렇게 십여 년을 즐기고 나서도 차를 연구하거나 만들어 보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고 그 실체를 마주하고 보니 생각보다 훌륭해 이것이 조선의 부국강병의 첨병이 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조선 땅에서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 없으나 중국은 차를 좋아하니 황제가 사는 곳과 더 가까운 조선에서 차를 만들어 수출하여 말과 무기, 재화와 바꿀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정책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차서(茶書)가 아니라 사회경제학지에 실려야 할 글이다. 또한 지금에 와서 보아도 틀린 말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실용적이고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실정은 생각과 아주 달랐다. 사대부들은 차에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귀양살이 하는 실학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차를 이미 아는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주제에 무슨 차람?’이란 생각이 뿌리박혀 있다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십 년간 유행했던 차가 황차가 아니라 조선 차였다면 이야기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초의는 <동다송>의 협주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4~50리나 군집해서 자란다. 우리나라 차밭 중에서 넓기로는 이보다 더한 곳은 없다. 골짝에는 옥부대가 있고, 아래로 칠불선원이 있다. 좌선하는 승려들은 뒤늦게 쇤 잎을 햇볕에 말린다. 하지만 나물국 삶듯 솥에서 끓여, 질고 탁하고 빛깔이 붉으며, 맛은 쓰고 떫다. 참으로 이른바 천하의 좋은 차가 속된 솜씨에 흔히 망가지고 만다.”


절집의 참선하는 승려들에게 차는 구전되어 내려왔었나 보다. <다신전>에서 “총림에는 조주풍이 있었으나 사라져서 다도를 알지 못한다.” 한 기록이 있으니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로 내려오는 풍습이었던 듯하다. 18세기를 살았던 이덕리가 차의 실체를 마주한 적이 있으니 19세기 초의의 이러한 기록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 중 일부는 차를 마셨다. 당시 유행하던 차회들은 대부분 산방(山房) 등에서 이루어졌는데, 말 그대로 산속의 방을 뜻하니 별장 정도가 되겠지만 동시에 이는 조선 후기 선비들의 모임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서재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차문화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고, 좋은 차는 스스로 구해서 마시기도 했는데, 사대부 신위가 쓴 <남다시병서>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남다는 호남과 영남에서 나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산과 골짜기에 파종하였다. 종종 차 싹이 돋았지만, 후인들은 쓸모없는 잡초라 여겨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했다. 요즘 들어 차가 나는 산지의 사람들이 차를 따다가 만들어 마셨으니 곧차다. 초의는 몸소 만들어 당대의 명사에게 보냈는데 이산중이 얻어 박영보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나를 위해 다려, 맛보았다. 그가 남다가를 지어 나에게 보이니, 나도 그 뜻에 화답하였다.” -1830





신위, 남다시병서



초의는 당대의 차를 아는 문인이나 사대부 등을 찾아가 자신이 만든 차를 선물하였다. 이를 구해 마신 신위의 제자 박영보가 깜짝 놀라 1830년에 <남다병서>를 지어 스승에게 올렸고, 신위가 바로 화답했다. 그러면서 일사천리로 초의가 만든 차를 대대적으로 선보이는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이듬해 정월 중순에 청량산방에서 차회가 열렸고 홍현주를 중심으로 서울의 유력한 사대부와 문인들이 모였다. 그곳에서 초의가 가져온 차로 밤이 새도록 모두가 나누어 마셨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후 1837년 초의가 <동다행>을 지어 홍현주에게 바쳤고 그 이름이 후에 <동다송>으로 바뀌었다.


대다수는 아니겠지만 일부의 양반들은 이미 차를 알고 있었다. 다만 우리 땅에서 나는 차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구한 규스도 있었고, 중국에서 난 귀하고 값비싼 차도 즐겨 마셨다. <남다시병서>에는 요즘 들어 남쪽에서 몇몇 사람들이 차를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초의가 스스로 이를 부정했다. 만들기는 하되 그 수준이 조악하여 안타깝다고 말이다. 초의가 만든 차가 사대부들에게 인정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 역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서글픈 일이다. 귀양살이 하던 호남의 실학자들과는 달리 서울의 사대부들에게 승려는 기꺼이 담소를 나눌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승려가 어째서 그들의 모임에 찾아가 시론(詩論)을 해야 하며, 글솜씨를 뽐내야 했을까. 그들에게 세상은 위와 아래로 구분되기 때문이고, 그 둘은 한데 섞이지 못한다. 양반은 승려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고, 차는 중국과 일본의 것이니 조선은 한데 어울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을 연구해 보면 될 것 아닌가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이 가능했다면 조선의 사대부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조선 땅에서 나는 물과 음식을 먹고, 그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모든 것은 중국의 은혜라고 믿고 산 세월이 수백 년이었다. 초의가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시와 문에 능통해야만 했을 것이다.


동다는 중국의 동쪽에서 나는 차라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東)의 다른 뜻이 올바름이니 동다는 곧 올바른 차라는 뜻이기도 하다. 초의는 이덕리의 <동다기>라는 선대의 기록을 통해 우리 차에는 맛과 약효가 모두 있다는 주장이 홀로 외치는 메아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대부들이 좋아하는 중국의 위인 두 사람을 들어 이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주체성 없이 흔들리는 차문화는 이러한 사실과는 큰 괴리가 있다. 올바름이란 내 안의 것을 먼저 뒤돌아보고, 발굴하고, 비판하고, 검증한 이후 선택할 줄 아는 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유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수신제가(修身齊家)와 같은 말들을 너무나 쉽게 말하고 가르치는 이들에게 초의가 던지는 의문이며 조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동다란 지금의 내 상태와 위치, 장점과 단점, 위기와 극복을 위한 계획 등을 돌아보고 조금 더 괜찮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올바른 선택이라고 보아도 좋다. 동다살림법은 그래서 언제나 섣불리 앞을 바라보거나 예측하려 하지 말고, 유명한 것과 값비싼 것에 휘둘리지 말고, 매일 같은 꾸준함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 면밀히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는 것에서 차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올 한해의 차는 이렇게 차분하게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정 다 인












이미지 출처 :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정민, 글항아리, 2018 /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정민, 김영사, 2011



조회수 257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