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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로운 아이의 진화


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9화












우리 딸에게 자못 아쉬운 것이 있다. 내 아이는 허세가 없다. 약삭빠른 점이 그다지 없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아예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허세는 없다. 허세와 거짓말은 다르다. 둘 다 현재의 사실을 다루지 않는 점은 같지만 허세는 거짓말에 비해 없는 사실을 아예 지어내는 것은 아니다. 가령 거짓말은 먹었는데 먹지 않았다고 이르는 것이라면, 허세는 배가 부른데도 더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딸은 부풀리기나 자랑 짓, 유세하기 등의 자질이 덜하다.


나는 그녀가 약간의 허세를 부렸으면 좋겠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미성숙한 상태로 치부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자기애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성장의 동력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성장을 위한 변수도, 가능성도 생길 일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허세는 꽤 괜찮은 동력이 되곤 한다.


독서 교실을 운영하며 많은 어린이의 안팎을 관찰해 왔던 김소영 씨의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아이가 <해리포터>를 너무 감명 깊게 읽고서는 스스로 옥스퍼드 혹은 케임브리지에 유학하러 가겠다는 꿈을 꾼다. 이미 그의 핑크빛 청사진에는 푸른 캠퍼스를 달리는 본인의 모습이 수놓아져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고민이 생겼다. 무슨 고민인고 선생님이 물어보니 이렇게 말한다.


“제가 고민이 두 개가 있는데요, 하나는 옥스퍼드에 갈지 케임브리지에 갈지 결정을 못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는 제가 둘 중의 하나를 골라서 가면 영어로만 얘기를 해야 해서 한국어를 잘 못 하게 될 텐데 그러면 엄마랑 아빠랑 형이 놀러 와도 영어로만 이야기해야 해서 의사소통이 잘 안될 수도 있어요. 선생님이랑도 영어로만 얘기해야 할지도 몰라요. 어떡하죠?”


귀엽다. 그리고 멋지다. 아이들의 고민은 낙관적이면서 진지하기 때문이다. 코미디지만 헤프지 않다. 그리고 이런 허세 덕분에 이 아이는 미래에 정말로 영국에 유학을 가게 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겠는가. 사실 우리가 사는 매일은 그저 오늘의 연속일 뿐이다. 어제도 오늘이었고, 내일도 오늘이다. 그러니까 이 허세는 오늘에 대한 맹세인 것으로 미래에 대한 선언인 셈이다.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내가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생각해 보면 이십 대 때의 내 모습도 허세였다. 지금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마치 정말 가지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일은 중요했다. 연애 부분에서도 잘 먹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허세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크기였다. 허세가 없었다면 지겨운 영화를 참고 견디면서 보지 못했을 것이고, 한 권의 두꺼운 책을 완독할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무서운 일, 지겨운 일, 인내가 있어야 하는 일, 버거운 일을 모두, 마치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일 뿐이라며 “훗 이 정도쯤이야”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꽤 괜찮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 어떻게 도약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요소는 반드시 즐기면서 해내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즐겁지 않아도 유의미하기만 하다면 허세가 그 일을 해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차 한 잔을 제대로 마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꼭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 의미 부여하는 태도는 훌륭하다. 자기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모습은 아름답다. 인내와 성찰을 스승과 배우자로 삼아 견디는 삶은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내 인생에서 요원하고 멀게만 느껴진다. 그럴 때는 허세를 취하며, 너스레를 떨며, ‘이 정도쯤이야.’라는 태도로 견뎌보는 것도 괜찮다. 한고비를 넘으면 분명 더 크고 넓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직 어린 우리 딸내미에게 오늘 이 아비가 해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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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iam Schapiro, Father and Daughter, 1997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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