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8장
차수건
동다살림법에서 쓰는 차수건은 몇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긴 것, 넓은 것, 작고 좁은 것 등 몇 가지 종류가 있지만 각각이 무엇에 쓰이는지는 당신이 조금 더 동다살림법에 깊이 관심 가지게 되었을 때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바닥에 놓기도 하고, 그릇을 닦을 때도 쓰는 차수건은 사실 모두 한 몸을 가지고 있다. 이럴 때는 이러한 종류여야 하고, 저럴 때는 저런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무명베로 만들었다. 우리는 차수건의 감을 모두 무명베로 통일했다. 무명베는 값싸고, 흔해서 구하기 쉽다. 동시에 알레르기 등에서 벗어나 모두가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우리 아기가 지금보다 훨씬 꼬맹이였을 때 엉덩이를 항상 순면으로 만든 천으로 감싸고 닦았다. 무명베는 은혜로운 소재기도 하다. 한반도의 오랜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만백성의 생활에 이보다 큰 도움을 준 물건이 있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같이 추운 겨울이면 남해 끝에서 압록강까지 온 동네에 얼어 죽은 시체가 흔했다. 면이 없었으니 무엇으로 옷을 해 입고 살았겠는가. 돈 있는 더러는 동물 가죽과 털을 덮었고, 돈 없는 대다수는 여름에나 입을 삼베를 겹겹이 걸치던가 거적때기 같은 짚을 두르고 허술한 세월을 수백 년 살았다. 임금이 있고 나라가 있고 사직이 있어도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따듯한 밥과 따듯한 옷이었다. 무명베는 고려 말 문익점을 통해 늦게나마 우리의 의식주를 개혁할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무명베를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차법으로서 중국의 상(床)과 일본의 다다미(畳) 혹은 비단과 다른 소재에서 출발한다는 표면상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우리는 도구가 가지는 의미에 주목하고 그것이 단순히 하나의 역할을 넘어 차살림에 직접적이고 깊이 관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감이란 소재로서의 차이를 구분하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자격을 갖춘다는 뜻도 만든다. 또한 대상이 되는 도구, 사물, 사람, 재료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감이란 우리말은 단순히 소재로서의 감각 차이뿐 아니라 그 소재가 담을 가능성의 폭까지 설명할 수 있는 참 좋은 말이다. 무명베는 저렇게 좋은 점이 많다. 값이 싸고, 흔하게 구할 수 있으며, 부작용도 없다. 그러한 실용적인 차원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명베로 만든 차수건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품을 가능성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이 차수건은 다른 어떤 색깔과도 잘 어울린다. 색깔뿐 아니라 질감과 형태도 모두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회화에서 캔버스가 어떤 색이고 어떤 재질로 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바탕은 그대로 지니고 있다. 앞의 글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 차살림은 여러 작가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은 그릇들을 함께 쓴다. 이럴 때 누군가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고 서로 어울리지 못하게 방해한다면 아름다움은 저 먼 이야기가 된다. 마치 캔버스처럼 어떤 색과 질감도 받아들이는 이 무명베 차수건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바탕이 되면서 동시에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품고 제 개성적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돕는 최고의 도구다.
무명베로 만든 차수건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명베의 그 많은 장점을 모두 뒤엎을 만한 치명적인 단점이 한 가지 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그것. 바로 얼룩이 쉽게 진다는 점이다. 차는 일부러 물을 들여 염색하기도 하는 좋은 염색 소재다. 그 말인즉 한 번 천에 물이 들면 쉽게 빠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차를 마시다 보면 필연적으로 찻물을 바닥에 흘릴 일이 생기는데 차수건은 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은 대륙의 도량으로 마구 흘려도 괜찮다는 식에서 아예 일부러 흘리는 방식으로 도구가 발전했고, 일본은 반대로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차법이 발전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차살림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부러 흘릴 필요는 없지만 흘리는 것이 흠도 아니다. 이 말은 이도 저도 아닌 무책임한 말이 아니라, 엄밀히 연습해서 흘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지는 것이 좋지만 찻물을 흘리는 것은 개인의 숙련도의 문제뿐 아니라 도구의 완성도에서 결정되기도 하고 모두가 갖춰져도 언제든 실수나 우연 등 의도치 않은 일들은 우리 삶에 흔히 일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찻물의 문제를 오히려 수행의 좋은 도구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 동안 트렁크에 접어 넣었다 펼쳤다, 매일 사용하다 보면 차 얼룩도 생기고 꼬깃꼬깃해지기도 한다.
한재 이목(李穆)은 〈다부(茶賦)〉에서 ‘건옥구이자탁( 玉 而自濯)’이라 썼는데 이는 흰 그릇을 꺼내 손수 씻었다는 뜻이다. 옛날 귀족의 차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이 책임졌는데 남아 있는 차 그림 등을 보면 귀족은 한가로이 나무 아래 그늘에서 바위 곁에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피우거나 낮잠을 자고, 멀리 떨어진 데서 종이 쭈그려 앉아 차를 끓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차는 귀족에게 즐기는 도구지 직접 수행하는 일은 아니었다. 이목의 저 말은 반대로 스스로 맞이할 손님을 위해 그릇을 골라 꺼내 놓고 씻으며 준비하는 모습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지 않는 태도는 중요하다. 하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일을 일부러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일이고, 이것은 예(禮)와는 달리 남을 기쁘게 해서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차수건에 묻은 얼룩을 지우는 일은 번거롭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마시는 찻자리에서 얼룩이 무어 대수로운 일인가. 흠이 아니라고 했으니 흘려도 나쁜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얼룩을 지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마치 빨래를 통해 겉에 묻은 더러움을 털어내고 더 좋은 내일을 준비하는 것처럼 찻물을 통해 내 안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수행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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