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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행동을 통한 깨달음, 두 번째


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9장


수고로움을 마다치 않는 것











차수건을 자리에 깔고 마시는 차는 번거롭다. 찻물이 흘러 차수건을 적시면 얼룩이 생기고, 한 번 쓱 닦아내면 끝인 탁자와는 달리 손수 빨고 말려야 한다. 여러 장을 준비해야 하고, 여러 번을 반복해야 한다. 어떨 때는 다림질로 다려야 할 때도 있고, 그 얼룩을 보고 있자면 아무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스레 홀로 머쓱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괜찮다고 했다. 얼룩은 내 차 생활의 일상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차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의 연속이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말로 옳음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많았어도 그걸 행동으로 실천해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차도 다르지 않았다. 차가 그저 약리적인 효용이 있어 즐겨 먹고 마시던 아주 먼 옛날을 지나 당나라 스님 교연(皎然)이 차 마시는 일을 그저 취미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여 다도(茶道)라 이름 붙인 이후부터 차는 수많은 지식인에게 수행의 도구이자 지침이 되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 차는 명상이 되기도 하고, 벗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종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차를 노래하는 시를 남기고, 서로가 서로에게 권했다. 그런데도 차가 진실로 인간이 나아가야 하는 길(道)의 끝에 있다는 것 -불교에서 ‘다(ढ)’는 모든 법으로 들어가는 본체의 마지막이므로 끝남도 시작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를 지나면 ‘무’에 이른다고 말한다. <대품반야경>과 <대지도론> 그리고 <대일경>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을 증명해 낸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행동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설명할 수 있겠나. 그건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이를 반복해야 한다면 무척이나 지겨워질 것이다. 차는 결국 몸을 움직여 굳이 번거로운 일을 만들고, 지겨운 일을 오늘도 내일도 반복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부정할 수 없다. 군살을 빼겠다고 결심한 당신이, 오늘은 아이에게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당신이, 잔소리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당신이 사흘을 채 이어가지 못하는 당신에게 차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는 당신에게 확실한 보상을 약속할 테니까.


중국에서 다도라는 말이 생겨나고, 이를 수행의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아간 세월이 수백 년이었지만 그들은 명·청 시대에 접어들며 다도를 그저 차 만들고 마시는 방법(道)으로 해석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면서 현대 중국의 다도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상업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에 머물렀다. 물론 중국이 어떠한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종주국이고 원형이란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정작 그들에게는 별 상관없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이 조금 달랐다. 그들은 후지기수였다. 중국이 부모라면 우리나라는 형제자매였다. 다만 우리가 그 역사와 깊이가 더 오래되었기에 손윗사람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일본은 차에 대한 열망을 보다 순수하고 미적인 차원으로 접근했다. 그것이 다른 점이었고, 수백 년의 이러한 집착은 새로운 분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일본만의 새로운 다도의 완성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무형의 미와 유형의 미를 동시에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와비에서 상(相)에 이르는 개념을 만들고, 라쿠와 규스와 같은 다기(茶器)를 만들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불교와 유학의 개념을 빌려오고, 중국과 한국의 도자를 바탕 삼아 만든 것이지만 그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결과물은 정교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다도를 경제, 사회의 차원에서 실용적인 도구로 치환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남겨두었다. 일본의 다도는 심상을 통한 구도를 목표로 한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잘 갈무리하고, 반복하여 더 이상 갈무리할 것이 없을 때가 이르렀을 때 이윽고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이를 차인이라 불렀다. 다만 그들은 이러한 매력적인 생각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차를 매우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어 놓았다. 그들은 이른바 차의 명인이 되기 위해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규칙과 서로 얽혀 있는 손짓과 발짓의 차이를 암기해야 했다. 이 색과 저 색이 달라야 하고, 이 손가락 앞에 저 손가락이 위치해야 하고, 이 도구와 저 도구 사이의 간격이 이 정도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것이 법이기 때문이라는 대답밖에 듣지 못한다. 심상은 단순해져야 하는데 암기할 것은 많고, 규칙을 신경 쓰다 보니 집중해야 하는데 이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두려움이지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는 즐거움은 아니다. 남에게 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여주는 일이기는 하지만 정작 자기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주 오래전 센 리큐의 제자였던 후루타 오리베는 오히려 카고노하나이레의 예를 통해 스승에게 이러한 답답한 규칙의 부자연스러움을 설명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질식할 듯한 차에서 어떻게 심상을 통한 구도가 이루어지는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병폐라 말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차수건을 쓰는 일은 번거롭다. 그리고 그러한 찻자리를 매일 반복하는 것은 번거로움에 번거로움을 더하는 일이니 지극히 번거롭다. 하지만 우리가 행동하는 삶이 아니고서는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러한 번거로움이 쓸모없는 일인지 아닌지 알고 선택하면 될 일이다. 차수건은 모든 것과 두루 잘 어울리는 존재다. 이를 사용함으로써 당신은 오롯이 당신에게 어울리는 찻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이 간편함에 초점 맞추어진 시대에 손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일부러 만들어 본다는 경험은 귀찮음을 초월하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거나 자랑하거나 으쓱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롯이 나만을 위한 일이다. 그렇게 반복하는 찻자리는 번거롭겠지만 마치 10억 년의 지루함을 이겨내고 만들어진 지구의 생태계처럼 당신을 든든하게 쓸어 보듬어주는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의 찻자리는 그러니까 행동을 통한 구도의 차라고 해야 하겠다. 우리의 차는 귀찮음, 지루함, 번거로움과 함께 하기도, 싸우기도 하는 일상의 차이며 관조와 반복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지루함과 번거로움 안에는 그걸 견딜 이유가 충분한 무언가가 있다. 더 괜찮은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차수건을 빨고, 부끄러워하지 말며, 마시자.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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