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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할 말은 제대로 하고 살자 _차 마시며 《햄릿》을 다시 읽고


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4화.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가 연기한 햄릿





얼마 전 이런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그럼 이 차들 중에서 저한테 어울리는 것들 좀 추천해주시겠어요?”

“손님이 …한 취미가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하신 것 같아 보이시니 저라면 …를 고를 것 같네요. 저는 이 차가 난초의 향과 견과류의 고소한 풍미가 느껴져서 좋은 것 같거든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아, 그런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기가 막힌 대화다. 나는 분명 두 명이서 하는 대화임을 목격했음에도 돌이켜보면 거기에 적어도 몇 명이 더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직원의 머리 꼭대기에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꼭두각시 놀이꾼 몇 명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직원의 대답은 주체도 없고 자아 없는 말이라 나라면 결코 살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곳곳에서 위의 화법을 마주하며 산다. 텔레비전이나 여러 매체에서 다루는 인터뷰에서도 예사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일상의 대화에서도 빈번하게 쓰인다. 어째서 사람들은 ‘나는 ~라고 생각한다.’는 주장을 ‘나는 ~것 같다.’라고 애매하게 바꾸어 사용하는 것일까. 친구 사이에서 무엇을 먹을지 서로 고민하는 상황이라면 조금 다를 수 있다. 나는 매운 것을 잘 못 먹으니 이건 조금 힘들 것 같다는 말은 이상하거나 오해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고객의 요구를 종합하여 추천해야 하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다. 인터뷰라면 어떨까. 한 분야에서 나름의 명성을 쌓았거나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의 인터뷰라면 전문성이 도드라져야 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저는 ~라고 생각합니다.’가 아니라 ‘저는 ~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왜 저 차 전문가는 ‘이것이 더 잘 어울립니다.’가 아니라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일까.


국어학자도 아닐뿐더러 문법의 지식도 얕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사실 저 발화가 결코 틀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문법적인 오류가 아닐뿐더러 논문이나 학회의 발표문이 아닌 일상의 화술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화용론(話用論)의 관점에서 잘못된 발화도 아니다. 즉, 누구나 쓸 수 있고 써도 괜찮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은 문법의 문제에 있지 않다. 넘쳐흐르는 자기표현의 시대에서 갈 길 찾지 못하고 헤매는 자기주장과 확신에 관한 문제다. ‘~것 같다’는 표현은 화용론의 관점에서 두 가지의 가능성을 가진다. 하나는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로 던지는 들뜬 말인 경우다. 나머지 하나는 사실 혹은 사실에 최대로 근접한 내용임을 알고 있음에도, 상대방이 너무 강한 주장으로 느끼지 않도록 한 발 물러서는 일종의 겸양의 자세인 경우다. 하지만 조금만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 자신의 취향 따위를 언급하고, 자신이 잘 아는 지식을 공유하는 데 겸양이 왜 필요한가. 겸양을 부리지 않는 것이 미덕인가? 나는 이것이 더 좋고, 이것은 싫으며,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태도는 미덕에 대한 조롱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편협한 미덕보다는 악덕을 택해야겠다. 변비 걸린 공무원처럼 말하는 밀턴의 《실낙원》 속 올바른 신하고 말을 섞느니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광기어린 사람들과 만나 한잔하는 쪽이 더 낫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감 넘치고,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쪽에 매력을 느낀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와도 쉽게 신뢰감을 형성한다.


단순히 신뢰감을 형성하고, 인기를 얻고, 더 유연하고 쉽게 설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나는 자기 언어란 자기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믿기에 훌륭한 화법은 단단한 자아가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아의 형성에는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역부족 할 뿐이다. Sns를 하면 할수록, 힙(Hip)한 것과 플렉스(Flex)한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우리에게 점점 사라져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진부한 것들이다. 지루하고, 바로 눈에 띄지 않고, 결과가 한 번에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와 유튜브가 나를 위한 더 많은 경험을 보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단순히 감각기관이 느끼고 뉴런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보란 반드시 자기 엿듣기(self-overhearing)의 과정을 거쳐야 단순한 경험을 넘어 ‘나의 경험’이 된다. 듣는 것과 자신을 엿듣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딘가에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녹음된 목소리가 어색해서 혹은 내가 말한 내용에 놀라거나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낯 설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 놀라움은 듣기에서 생긴 것인가 엿들어서 생긴 일인가? 자기 엿듣기(self-overhearing)의 사전적 정의는 화자 자신이 알고 있거나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의 말을 듣는 것이다. 힙한 것과 플렉스한 것들과는 아예 관계가 없어 보이는 햄릿(Hamlet)이야말로 이 분야의 장인이라 할 만 하다.


대부분의 이들이 햄릿을 우유부단함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햄릿이야말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며 변화하는 인간의 의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햄릿》의 4천행이 넘는 대사 중 1,500행이 햄릿의 대사임에도 여기에는 햄릿이 스스로를 정리하고 정의내리는 핵심적인 대사가 하나도 없다. 현대 판본으로도 2천 페이지가 넘는 대하소설 급의 분량 내내 스스로를 정의내리며 다그치는 돈 키호테(Don Quijote)와 완전히 반대인 셈이다. 극 전체를 통해 햄릿은 스스로를 엿듣는 행위를 통해 다음 장면의 자신을 만들고 창조해 나간다. 일곱 개의 독백 중 가장 유명한 독백에서, 창칼을 들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하는 자신의 소리를 엿듣는 햄릿의 모습을 보라. 500년 문학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루었던 문제의 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위대한 시인(작가)의 정신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 덩어리가 아니라 저 멀고도 깊은 곳의 바다나 아예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세계에까지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 창조한 것은 자라나는 자아의 정신을 위협하는 요소에 저항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다. 단발마의 비명이나 속삭임 같은 목소리가 아니라, 굳건한 의지로 점철된 강인한 목소리다. 언뜻 스스로에게 내리는 지엄한 명령 같아 보인다. 햄릿이 보여주는 자아탐구는 절대적이며,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찮은 것으로 무시해버린다. 그는 자신의 말이기도 하고 또 아니기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되새기며 자기의식을 연구한다. 그것은 성찰에 탐구하는 수행자가 아닌가. 혹은 차를 통해 선(禪)의 세계에 발 디뎠다는 대가들의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 아는가? 셰익스피어가 1600년에서 16001년 사이 《햄릿》의 판본을 공연할 때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외아들 햄넷(Hamnet)을 잃었다. 주인공 햄릿 역시 아버지도 없이, 부왕의 유령의 목소리만을 들으며, 아들도 없이 죽게 될 것이다. 오직 그가 남길 수 있는 것은 자아와 거기에 깃든 카리스마 뿐이다. 그는 부활이나 사람들의 상념에 영원히 남을 시적 영원 같은 것들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이름이 더렵혀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이아고와 부유한 지주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지독한 허무주의자라도 이 상황이라면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더럽혀질 것인가에 대해 햄릿만큼 고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주의자도 아니고, 순교자도 아니며, 고독한 수행자는 더더욱 아닌데다 허무주의자이거나 신비론자도 아닌 나와 당신은 더욱이 신중하고 정직하며 옹골차게 생각하고 말하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우리의 찻자리란 결국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노력이고 그 과정에는 홀로 마시는 찻자리에도 내 앞에 또 다른 나를 앉혀 볼 줄 아는 시도가 필요하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바야흐로 다시 한 번 노력을 시도해 볼 때이다. 차를 마시며 《햄릿》을 다시 읽다가 문득 떠오른 종업원과의 지난 경험을 상기하며 풀어 놓은 오늘의 생각이었다.




글.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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