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다 보듬이 03 : 하늘꽃보듬이 _ 민들레
아무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다. 한 걸음에 한 송이는 예사다. 누군가는 밟고 지나고, 밟히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선다. 쓰디쓴 그 맛에 고채(苦菜)라고 불리지만, 이른 봄에 피어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까지 온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다 하여 만지금(滿地金)이라고도 불린다. 꼬마는 쪼그려 앉아 동그랗게 맺힌 홀씨를 후 불어본다. 입바람에 폴폴 날리어 민들레 홀씨가 하늘로 흩어진다. 한참 보고 있자니, 여름이다.
강의가 없는 날 아침나절, 아버지는 늘 뜰에 계신다. 텃밭 열무에 물을 주고, 양파를 거둬들이고, 차나무 아래에 일군 참나물 밭이며 방아 덩굴 사이에 잡초를 뽑으신다. 소나무 손질을 하시는가 싶더니 어느새 까치수염이며 원추리가 피기 시작하는 꽃밭을 돌보고 계신다. 아버지는 너른 정원과 텃밭을 수십 년 동안 어머니와 단둘이서 가꾸어오셨다. 일 돕는 이 없이. 오직 매일 한결같이. 올해, 아버지는 부쩍 쉬이 지치신다.
나는 아버지 곁에 선다. 지난해 봄부터니 두 해째다. 처음에는 하라시면 꾸역꾸역하고, 힘쓰는 일을 돕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는 나름 깜냥이 생겨 일 순서를 안다. 솔잎 색을 보면, 해충이 들었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눈 정도는 생겼다. 밭고랑 잔풀은 자주 긁개로 긁어주어야 밭매기가 수월하다. 김매고 난 잡초며 차밭에서 베어낸 풀은 푹 삭혀야 좋은 거름이 된다. 다만, 나는 요령이 모자란다. 땀이 솟는 매 순간이 견디기다.
아버지가 장화를 벗으신다. 밀짚모자를 벗고 장갑도 벗으시면, 이번에는 내 차례다. 장화에 묻은 흙을 털고, 호미며 쟁기에 묻은 흙도 털어낸다. 전지가위나 톱에는 기름칠해서 제자리에 넣어 둔다. 허리를 펴면, 그제야 물린 모기 데가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순서대로 몸을 씻고 나와,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며 매실 딸 일과 다음 주 강의 일정을 이야기한다. 더 힘을 빼고 짐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나 더 힘을 올리고 기꺼이 짐을 어깨에 지기 위해 견디는 일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같이 차를 마신다. 한 잔, 두 잔. 씻어 말린 등줄기로 다시 땀이 흐른다. 한나절 일한 열기인지 차 덕분인지 알 수 없는 즈음, 서툰 무언가에 스멀거리던 불안이나 짜증은 가라앉고, 시원한 바람이 와 닿는다.
개운해진 마음에 새 보듬이가 한결 눈에 든다. 찻자리에 민들레가 피었다. 밭 한가운데 나면 그저 뽑아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을 잡초지만, 뜰 어딘가에 피면 그저 두기도 하는 꽃. 내 사랑하는 꼬맹이는 까르르 웃으며 후후 민들레 홀씨를 불고, 쓴 풀은 필요할 때 약도 되고 때때로 생각할 거리도 된다며 그냥 두라 하시던 어머니 아버지 말씀도 떠오른다. 섬세히 새겨 넣은 꽃이 잔잔하다. 곱디 고운 선이 이어지며 나를 어딘가로 이끈다. 문득,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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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전, 여름 밭에는 콩과 옥수수, 고추와 가지가 자라고, 너른 들에 빨간 벽돌집 한 채뿐이던 시절. 밭에는 나무로 짓고 기와를 인 동다헌이 서고, 소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차밭이 생겼다. 마당 꽃밭 같은 텃밭에는 여전히 콩이며 가지가 큰다. 차를 마시며, 보듬이에 핀 민들레 한 송이가 긴 세월을 마주 보게 한다.
2021년 6월, 망종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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