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14장
차살림 준비
_꽃병
센 리큐(千利休)는 꽃과 대화를 할 줄 알았나 보다. 저 먼 옛날 꽃 한 송이를 들어 아무 말 하지 않고 설법하셨다는 석가모니와 이를 용케 알아들은 마하가섭의 이야기처럼 꽃의 이야기는 말없이 이루어지는가 보다. 꽃은 입이 없으니, 우리가 하듯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다만 세상의 모든 의미가 그러하듯 우리는 자연의 뜻을 읽어내야 하는 소임을 맡고 있고, 응당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센 리큐가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은 석가모니의 이야기를 잊고 꽃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다. 마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처럼 찻자리에서 꽃은 자신의 부유함과 미적 감각, 힘의 크기를 자랑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꽃을 구하는 것은 권력의 정도와 비례했고, 비싼 꽃을 최대한 많이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재력의 크기가 그만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마치 식테크(식물을 키워 팔아 재테크하는 요즘 세상의 한 방식)처럼 꽃은 나를 자랑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꽃병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갔다. 자연물이 아니니 계절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고, 돈만 있다면 구하기는 훨씬 쉬웠다. 카라모노(唐物)라 불리는 이른바 명품 화병들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당나라와 송나라를 거쳐 들어온 중국의 화병과 고려나 조선의 화병은 당시 일본인들이 직접 만들 수 없는 저 먼 세상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남다름을 보여주기 위해 앞다투어 화병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십 년, 이십 년, 백 년이 흐르면서 자본은 유실되고 취향은 맹물처럼 엇비슷해져 갔다. 사치가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치가 새로운 미적 경험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사치만을 낳을 뿐이니 발전 없이 제자리만 맴도는 어항 속 금붕어 같은 꼴이 되고 만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어느 해 과거시험이 치러진 후에 친구 전이지에게 편지하기로 “올해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조소했다. 돈이 들지 않는 글쓰기도 이러할진데 돈을 쓰고도 비웃음당하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센 리큐는 자신의 스승과 그 스승의 정신적 스승의 대부터 이어져 온 와비차의 결말을 보고 싶었다. 앞 시대의 차가 서원(書院)이라는 글자가 무색하게도 자랑과 과시, 굴복과 복종의 차였다면 와비차는 이 모든 것의 판도를 뒤집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의 차였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차는 온 감각을 사용하는 일이기에 손발이 닿는 모든 도구에서부터 자리와 공간까지 새로워야 했다. 센 리큐가 고안하거나 손댄 모든 것이 국보가 되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죽일중절화입(竹一重切花入)이다. ‘타케이치에키레’ 즉 죽일중절은 일본 다도구를 대표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름처럼 이 물건은 도자기가 아니라 대나무로 만들었다.
불과 백 년 전까지 사람들에게 가장 쓰임이 많았던 식물은 대나무였다. 도시에만 살았던 당신은 대나무숲에서 와호장룡의 한 장면을 떠올릴 테지만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젓가락에서 집수리에까지 폭넓게 쓰이는 대나무는 언제나 마을 가까이 살았다. 대나무숲은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모두 흔하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값비싸고 중요한 자리에 쓸 수 있다면 꽤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다. 죽일중절은 대나무를 화병 하나 크기로 자른 후 상단에 원통형으로 크게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대나무를 무겁게 한 번 잘라냈다는 그 이름다운 모양새다. 뒷면에 그의 사인이 없었다면 동네 잡부가 그저 심심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법한 이 단출한 도구가 나만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아닐 것이다.
한칼에 자른다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여러 수식어를 함축하고 있다. 깔끔하게, 힘을 주어서, 신중하게, 마음을 담아서,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자른다는 뜻이다. 마치 우리가 이전 글에서 살풀이춤과 차살림의 자리수건은 무겁고 천천히 다루라 한 것처럼 이 대나무 통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센 리큐 스스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꽃병의 목적은 꽃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일본어에서 꽃병은 ‘하나이레(花入)’다. 직역하면 ‘꽃이 들어가다’ 정도가 된다. 하나이레는 꽃병도 되지만 꽃꽂이도 된다. 꽃을 다루는 모든 작업과 정신을 하나이레라 말해도 손색이 없다. 꽃이 주인공이다. 여기에 그 어떤 의심도 없다. 꽃을 꽂는 이유도, 꽃을 다루는 이유도 모두 꽃을 보고, 꽃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꽃병은 꽃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다. 화려함을 원한다면 화려하게 보이도록, 소박함을 추구한다면 소박하게 보이도록 도울 줄 알아야 꽃병이다. 꽃병은 꽃을 품어서 지키고, 꽃의 언어를 들을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와비차의 꽃병과 서원차의 꽃병은 달라야 하고, 당신과 나의 꽃병은 같을 수 없다. 우리 집 꼬맹이가 나에게 꽃이고 내가 그녀의 꽃병이 내가 되는 것처럼 당신에게도 꽃이 있고 꽃병이 있다.
센 리큐는 금박을 입힌 차실 대신에 조선의 초가집 같은 소박한 차실에서 차 마시기를 권했다. 수입한 명물 다완을 사용하기보다는 직접 고안하고 고국에서 만든 라쿠를 쓰기를 권했다. 그런 찻자리의 풍경이라면 성(城) 하나만큼 비싼 화병 말고 동네 뒷동산 대나무숲에서 구해 만든 화기가 더 잘 어울릴 것이다. 꽃이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언어란 그 삶의 결이고, 어울림이니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찻자리가 하나의 결로 만들어졌다면 참으로 아름다웠겠구나 싶다.
정 다 인
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