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8화
찻그릇은 그릇의 왕이다. 동시에 왕자이기도 하고, 공주이기도 하다. 공작이기도 하고 백작이기도 한데, 어떤 식상하고 귀한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그릇이다. 예로부터 미감이 뛰어나고 갖가지 귀한 보물을 사랑해 온 수집가들이 그렇게 불렀으며, 그 위상은 조금 다를지라도 요즘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찻그릇이 귀한 이유는 세 가지다. 이는 온전히 내 생각인데, 찻그릇은 만들기가 어렵고, 한정된 형식미에서 최대한의 추상미를 뽑아내야 하며, 지난 천 오백여 년의 세월 동안 쌓아 온 사회적 위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언제 기회가 있어 찻그릇에 관한 미학을 보다 자세하고 재미있게 다루어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면의 한계가 있어 줄이자면 그렇다. 차의 종주국인 중국이나 차의 정신사를 정립한 일본에는 특히 이러한 세 가지 이유가 서로 얽혀 귀한 대접을 받는 찻그릇들이 꽤 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중에서 일본의 국보인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자에몬이도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 감상한 인물이 손에 꼽는데 앞서 말한 평강 선생 그 중 하나다. 《조선 막사발과 이도다완》이라는 책은 한때 우리나라에 이도다완에 관한 논쟁의 불씨를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들에게 이 그릇은 논쟁이나 왈가왈부의 대상이 아니다. 함부로 입에 담아 비평하는 것도 삼간다. 그래서 평강선생의 비평을 제외한다면 이 그릇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문장이라면 십 년도 아니고 무려 백여 년 전 사람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남긴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국보 기자에몬이도를 더러 천하제일의 찻잔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 다도에서 찻잔은 세 가지로 나뉜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가져온 것, 조선에서 전래된 것, 일본에서 만들어 진 것.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조선의 것이라 당차게 말한다. 그리고 최고의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많고 많은 명기들 가운데서 기자에몬이도를 천하제일의 기물이라 정리했다. ‘다도茶道의 아름다움 그 절정이 이것이고, 모든 경지가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라고 감상하며 이 아름다움에서 일본 다도의 기나긴 흐름이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습고 슬픈 일이다. 저 그릇을 조선에서 비롯했다. 다도라는 말의 시작은 중국이지만, 현재 우리가 흔히 쓰고 사는 ‘차 우리고 마시는 일체의 행위’를 상징하는 말은 일본의 것이다. 일본 역사에서 위기의 순간 구원자로 등장해 무너질 뻔 했던 사회를 구원했던 일본성日本性의 요체를 상징하는 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어찌 보면 일본의 정체성을 설명할 이 다도라는 단어가 쌓아 올린 지고한 산자락 꼭대기에 조선의 그릇을 올려놓은 셈이다. 허나 그의 태도에는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어 보인다. 그의 미적 개념은 이해하기 조금 번잡하고 야생마처럼 거친 구석이 있지만 요약하자면 낳은 정과 기른 정이 어느 것 하나 더욱 낫다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존재가 될 지는 결국 기르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85) 본격적으로 일본에 전래되기 시작한 차문화는 무로마치室町시대(1336~1573)에 접어들며 당나라의 문물, 즉 카라모노唐物를 숭배하는 차문화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고 이는 사치와 무질서의 폐단으로 이어진다. 쇼인즈쿠리書院造는 본래 중세 일본건축의 한 양식인데 이것이 차문화에서는 호화로운 차실에서 열리는 거대한 차회와 그 형식을 일컫는 일종의 문화적 용어가 되었고 이는 일본 사회의 병폐를 보여주는 단면과도 같았다. 긍정적으로 매사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현상은 물론 외래문물을 받아들여 자기화 하는 과정에서 으레 치를 수밖에 없는 시련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그 시련이 깊고 길어지다 보면 극복하기 점점 어려운 법이다. 그 즈음 다케노조오武野紹鷗는 시대와 사회의 병폐를 수습할 방안으로 새로운 차도구를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간단하고 명료하며 실로 바늘 백 개를 단번에 관통하는 신묘함이 있었다.
'도구가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다.
‘아름다움은 바로 보는 것이다. 눈과 사물 사이에 무엇도 끼워넣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용해야 한다. 자꾸자꾸 써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계속하여 사용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손과 마음에 익히게 된다’
다케노조오는 중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그릇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큰 돈을 번 상인이자 동시에 최고의 예술 애호가였으며, 당대 제일의 감식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으레 명품이란 차가운 선과 정확한 형태, 화려한 색감과 날카로운 질감이 권위적이고 위압적이어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마음에 자연스레 가 닿는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는 불현 듯 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생활 잡기 중 크기와 모양이 적당하기만 하면 찻그릇이나 차도구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혁신안을 꺼내든 셈이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소위 이도다완이라 불리는 형태의 그릇들이었다. 이도井戶라는 이름은 이후 그의 제자 센리큐千利休의 시대에 이르러 전설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센리큐는 이 그릇을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권하며 전국 통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게 했다. 당시의 무사들은 차회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빈번했고, 센리큐의 차법을 이용하여 노부나가는 무사들에게 불신을 신뢰로 바꾸는 경험을 선물했다. 이 그릇은 화려함과 사치 사이에 숨어 있던 기만과 배신, 증오를 단박에 깨버린 그릇이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너와 나는 하나다. 그 어떤 부귀영화를 약속하며 꼬드기는 것 보다 확실한 이 행동 하나에 무사들은 감동하며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이도다완은 그 때부터 기존의 병폐에 가득한 과식적인 차를 버리고 분열된 일본을 하나로 만드는 소박하고 내재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31년 3월 8일 일본 선종의 위대한 승려 중 한 사람이던 고보리겟슈의 승낙을 얻어 이 찻잔을 볼 수 있게 된다. 1956년 교토에서 여러 이도다완 중 그 가치가 떨어지던 그릇 하나가 500만 엔에 거래된 것을 생각해 보면 이도 중의 이도라는 저 기자에몬이도의 가치는 화폐로 매기는 행위가 별 의미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거대한 값어치와는 역설적으로 이 그릇은 극도의 사치로 분열하고 황폐해졌던 한 시대를 종식시킨 주인공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기자에몬이도를 바라보면 생각한다. '좋은 찻잔이로구나, 그렇지만 어떻게 이처럼 지극히 평범할까’ 심미안의 소유자 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 지극한 평범함이 이 그릇의 값비쌈을 증명하는 걸까? 그럴리는 없다. 단적으로 말해 미술에서는 평범함에 제대로 된 값을 매기지 않는다. 기자에몬이도는 장식 하나 없다. 꾸밈도 없다. 그의 심미안은 이 그릇을 평범하게 낳은 어미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를 특별하게 기른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흙은 그저 뒷산에서 퍼냈고, 유약은 화로에서 꺼낸 재다. 물레는 나무가 느슨해져 있을 것이고, 모양에 별 손을 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많이 만들어서 빨리 구워냈다. 표면이 거칠게 느껴진다. 손이 더러워진 채 매만졌을지도 모른다. 유약을 정교하게 바르지 않고 그저 흘려서 굽에 드리우기까지 한다. 장인은 문맹이었고 가마는 초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다. 오히려 그래서 좋은 것이다.’
이 그릇을 둘러싼 여러 거창한 이야기들을 그저 모르더라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편안케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좋다. 순탄해서 파란을 만들지 않는 것, 꾸밈이 없어서 뽐낼 것도 없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꾸미지 않아도 되는 것은 마땅히 경애를 받아도 좋은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꾸미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우리의 주변에 과연 몇 가지나 될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건전하기 그지없다. 오직 쓰이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쓰이기 위해서 의미가 재평가 된 물건이다. 일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일함으로써 그 기능이 만족된 물건이다. 그래서 튼튼하다. 유약해서는 실용할 수 없다. 그저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진 그릇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더러 ‘여기에는 병에 걸릴 기회가 없다’라고 말했다. 기교의 병에 걸릴 일이 없고, 인정받기 위한 아름다움을 목적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은 까닭에 의식함이 지나쳐 걸리게 될 독이 없다. 무슨 명문장을 곁들이거나, 주변을 꾸미기 위한 도구가 따라 붙을 필요가 없기에 필요 이상의 것이 쌓이는 죄의식이 스며들 일도 없다. 이 모든 것은 평범함이 만들어내는 선물이다. 이 찻그릇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러한 아름다움의 존재를 믿는 그와 우리의 마음 때문이다. 비범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조작한 것보다 원래 그대로라서 아름다운 것들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값의 의미 말고, 내가 두고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투영하며 사랑했던 존재들을 헤아려 보자. 내가 더 많이 담겨 있을수록, 가식 없이 그대로의 나를 투영할 수 있는 만큼 그 사람이 내겐 더 소중하고, 그 물건은 더욱 값진 것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물을 그렇게 바라본다면, 그렇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 사물에게 훌륭한 어미가 되지 않을까.
글.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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