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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탐미주의자가 찻그릇을 만든다: 북송여요청자잔탁


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09








북송여요청자잔탁北宋汝窯靑瓷盞托 _ Percival David Foundation of Chinese Art 소장


 



이 빛깔을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초록빛깔과 파랑이 섞이고, 하양과 회색빛깔이 감도는데 그나마 우리나라 말에는 푸른빛깔이라는 좋은 단어가 있어 한결 설명하기 수월하다. 하지만 이 마저도 이 도자기의 색을 온전하게 표현하기에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법한 고상하고 우아함과 동시에 이를 설명하기에 어울리는 말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난처함이 공존한다. 부드럽고 고운 이 유약으로 덮인 그릇 받침대는 넓은 꽃받침 모양이다. 다섯 장의 꽃잎 모양이 대칭이 되어 다섯 방향으로 제각각 들어 서 있고, 그릇을 담는 컵은 속이 빈 채로 구부러진 면이 곧게 입 테두리로 올라간다. 다섯 장 각각의 꽃잎은 끄트머리에 와서 살짝 위로 굽어지는데 이 각도가 또한 일품이라 당대에 적수가 없을 기묘한 품위가 느껴진다. 다섯 장의 꽃잎은 가로로 길쭉한데 각각의 잎사귀가 마치 직선인 듯 곡선인 듯 미묘하게 뻗었다 서로 만났다를 무한으로 반복한다. 원형이면 원형, 사각이면 사각, 곡선이면 곡선임이 분명했던 시절에서 만나는 묘한 현대적인 기시감이다. 청자잔탁靑瓷盞托이니 청자로 만든 잔받침을 뜻하는데 보통 귀한 사람이 썼을 것 같지 않다.



오늘의 주인공 북송여요청자잔탁北宋汝窯靑瓷盞托은 이름이 길어 보이지만 풀어보면 그 뜻이 매우 쉽다. ‘북송 시대 여요라는 가마에서 청자기법으로 만든 잔받침’이라는 뜻이다.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청된다. 이 시대는 중국의 일반역사 뿐 아니라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 이후 회복에 실패하자 오대五代라 일컬어지는 다섯 개의 이민족 국가로 분열이 되었고 959년 조광윤이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새 왕조의 첫 황제로 등극했다. 이것이 송宋나라였다. 처음에는 이 송왕조도 다른 왕실처럼 단명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광윤은 유능한 리저였고 16년의 정력적인 군사활동 끝에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일하였다. 허나 굿리치Goodrich의 지적처럼 송나라는 결코 주변을 둘러싼 여타 민족의 살벌한 경계선을 넘을 수도 침범할 수도 없었다. 북쪽으로는 거란과 여진, 몽고가 있었으며, 북서쪽으로는 티벳족인 당항과 몽고가, 남서쪽으로는 안남과 남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1125년, 송나라는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여진족이 수도 개봉開封을 침략하여 예술가이자 감식가이며, 한 나라의 수장이기도 했던 황제 휘종徽宗을 포로로 잡아 조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1127년 젊은 황태자와 호위 관료들은 양자강을 너머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몇 년 간 이곳저곳을 방황하다 마침내 임시로 항주杭州에 정착하여 송왕조의 대를 이었다. 여진은 스스로를 금金이라 부르고 북중국 전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송나라로부터 매년 막대한 양의 공물로 화폐와 비단을 받고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다. 송나라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의 북송과 이후의 남송으로 나누어 불리게 되었다.



황실이 예술 활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후원하는 전통은 서양에서 흔해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 앞서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경향이 뚜렷했다. 특히 말년에 포로로 사로잡혀 치욕을 당한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대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휘종은 12세기가 시작될 무렵인 1101년부터 재위에 올라 1125년까지 황제의 권위를 지켰다. 그는 서화書畫와 골동품, 특히 도자기에 대한 열정에 남달랐는데 덕분에 예술사에서 그는 유별나게 독특하고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천재이자 남다른 열정을 지닌 후원가, 그리고 그 스스로의 이름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뛰어난 작가로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반대로 일반역사에서 휘종은 예술에 대한 열정에 빠져 나라가 위기에 빠지는 것도 보지 못한 우군愚君에 속한다. 휘종은 1104년 궁정에 공식적인 미술학교 화학畫學을 세웠다. 휘종은 직접 궁정 내의 작가들을 철저하게 관리했는데, 그림을 그릴 주제를 나누어주어 마치 화가들이 관직 후보자인 것처럼 시험을 치르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주제는 보통 시詩의 한 구절이었으며 재치 있고 은유가 뛰어난 답안에 상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휘종이 “대나무숲 우거진 다리 옆 선술집”이라는 주제를 던졌을 경우 합격자는 선술집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나무 숲 사이에 보이는 술집의 간판이나 깃발로 이를 암시한 사람이었다는 식이었다. 휘종은 작가들에게 단순한 학문적 사실주의가 아니라 지적으로 기민하고 융통성 있으며 동시에 은유를 통해 착상을 유희하는 과정을 요구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도자기는 힘이 넘친다. 청나라의 도자기는 완결성과 마감의 면에서 완벽에 가깝다. 송의 도자기는 당과 청의 자기 사이에서 힘과 미감의 완벽한 줄타기에 성공한 경우로 보아도 무방하다. 선이 뿜어내는 완벽한 균형감, 유약이 완성하는 색의 고전적인 순수함이 놀랍다. 북송 시대 유명한 도요가 여럿 있었고 절강이나 강서와 같은 곳에 그 이름을 떨친 가마들이 있었으나 북송을 대표하는 가마는 하북성 정주 근처의 정요定窯였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고전적인 그릇들은 섬세하게 만들고 고온에서 구웠으며 유백색의 유약을 바른 것인데, 백자의 색을 지칭하는 너댓가지 표현 중 유백자乳白磁는 이곳이 상징적이다. 이 도자기들은 유약이 아래로 흘러내려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했는데, ‘누흔淚痕’이라 부르는 엷은 갈색의 색조를 띄고 있다. 지나치게 독특한 기준으로 매사에 까다로웠던 황제 휘종은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벽한 균형과 무결점주의를 표방했던 기준에 어긋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모두가 좋다고 찬양하는 것을 일부러 멀리하려는 심리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휘종은 누흔이나 테두리의 금속 구연부 등의 이유를 삼아 수도 개봉 안에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관요官窯를 하나 만들었다. 그것이 여요汝窯다. 지금은 황하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오랫동안 파묻혀 있거나 휩쓸려 내려가 그 소장품이나 진품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모든 송대 자기들 중에서 가장 희귀한 여요는 그 값어치만큼이나 쉽게 특징이 두드러진다. 엷은 자주색을 띤 청록색 유약으로 덮이고 누르스름하거나 주황색의 몸통을 지니고 있으며 겉 표면은 운모와 같은 가는 균열로 덮여 있다. ‘절묘한 단순성’이라는 마이클 설리번의 표현에 딱 맞아 떨어진다.



잔탁은 고대시절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차문화가 동아시아 내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세를 떨치는 문화였는지를 보여주는 도구가 아닐까. 술을 담아 마시는 술잔은 그 자체로 다리가 있는 경우가 있었으나 따로 고귀하게 빚어 구운 도자기를 받침으로 쓰지는 않았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에 사용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죽은 이들을 위한 문화지 산 사람이 즐기는 문화는 아니었다. 차는 달랐다. 그 자체로 완벽에 가까운 이 잔탁盞托은 오로지 살아 있는 사람 중 세상 귀한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휘종 스스로가 빚어 구웠는지 그의 닦달을 재료 삼아 당대 이름 날리던 도공이 구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이 잔탁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차란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고, 그에 걸맞는 귀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요란한 수식어나 보기에 거창한 장식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구가 예술적 가치가 빛나기 위해서는 목적을 잊지 않고 그 본래적 쓰임에 충실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 이 받침이 돋보이는 것은 비단 여요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찻그릇을 받치는 용도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귀한 차를 받드는 스스로의 목적성을 잊지 않고 장식적인 수수함을 취했기 때문이다. 극도로 절제된 선과 오로지 은은하게 빛나는 색으로만 장식한 완성미가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이 잔탁이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단순히 여요에서 만들어진 때문이 아니라, 휘종의 까다로운 미적 취향이 여요를 그러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자기에서 한 명의 탐미주의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아니겠는가. 누누이 말하지만 찻그릇은 작가가 만들기도 하지만, 차와 예술을 사랑하는 나와 당신이 만드는 것이기도 함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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