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5화
차를 담아 마시는 그릇 종류 중에 완(碗)이라 것이 있다. 사발이라 말하기에는 조금 작고, 잔이라고 보기에는 크다. 애매한 크기의 이 그릇은 보기에 따라 달라 쓰임새를 정확히 추측하기가 어렵다. 특히 차를 즐겨 마시지 않거나 유물 따위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흔히들 아래굽이 있고, 높이가 손가락 두어 마디 안쪽에 그치는 잔에 차를 담아 마시지만 이 방식은 중국에서 자사호가 등장하고 이에 걸맞는 종류의 다기(茶器)의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일본에서 부흥한 것으로 오늘에 이른다. 잔은 인류 역사를 넓게 보았을 때 아무래도 차 보다는 술에 더 가까웠던 셈이다. 둘레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도 남아 보이는 사발은 대대로 밥이나 국을 담아 먹었다. 16세기 일본에서 시작한 농차법(濃茶法)에서는 이보다도 더 큰 거대한 사발에 차를 담아 모임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돌려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오래된 사용의 흔적을 좇다 보면 사발의 주된 쓰임새는 공양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스님들은 사발에 밥과 찬을 담아 깨끗이 먹고 닦아 썼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사발은 밥을, 잔은 술을 담아 마시던 역할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담당해 왔던 셈이다.
그렇다면 완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던 걸까.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의 그 유명한 화법을 빌어 말하자면 완은 오직 차의, 차에 의한, 차를 위한 그릇이다. 완은 오직 차를 마시기 위해 고안되고, 쓰인 그릇이라는 뜻이다. 물론 오늘에 이르러 이 크기의 그릇이 식사를 담는데 적합하다 생각한 모더니스트들은 더러 밥이나 국, 조금 작게는 반찬을 위한 그릇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쓰임새를 발견한 것은 위의 용어 그대로 현대(modern)에 이르러서다. 조금 빠르게는 20세기 초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부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형태는 물론이거니와 쓰임새와 용도까지 이전의 고유한 영역은 사라지고, 바뀔 수 있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그릇은 처음부터 오늘까지 오직 차를 위해 만들어졌다. 비슷한 크기의 밥그릇이 존재할지언정 그를 우리가 완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중국에서는 아주 오랜 세월 차를 완에 담아 마셨다. 정확하게 지목하기는 어렵지만 추정하기로 후한시대 이후 진나라 시대 혹은 그 앞뒤를 포괄하여 위진남북조 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일본 역시 헤이안(平安) 시대 이후부터 천목다완(天目茶碗)을 당나라에서 비싼 가격에 수입하여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완의 시대가 열렸다. 차가 그 나라의 본격적인 문화생활품목으로 받아들여지면 완은 당연하고 자연스레 흘러 들어왔다. 물론 일본의 천목다완은 중국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던 흔하고 저렴한 그릇이 대개였으나, 독자적인 차문화가 없어 중국차를 그대로 이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일본은 부귀와 사치를 증명하는 용도로 이 그릇을 사용했다.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 차방(茶房)이 심심찮게 있었던 차문화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서히 씨 마르기 시작한다.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에서 시작하여 목은(牧隱) 이색에 이르던 고려 말 성리학파의 후예들은 조선 중기까지 영남사림(嶺南士林)으로 불리며 학맥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스승 대대로 즐겨 마시던 차를 버리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분량과 결에 맞지 않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들의 선비정신과 성리(性理)에 대한 이해란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탐구하는 데 닿아 있어서 차의 성질이 선비가 추구하는 세계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한 의도를 모든 사대부들이 공감하지는 못했던 것인지 영남사림파는 김종직 대에 이르러 불어 닥친 피비린내 나는 정치모략의 희생양이 되어, 차를 사랑하고 즐기며 시를 쓰던 전통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한줌의 재와 이슬로 사라졌다. 차문화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음지로 물러나게 되었다. 조선의 주류 문화에서 외면 받게 된 차는 한 번 더 시련을 겪게 된다. 왜란과 호란 이후 개편한 생활예법에서 차례(茶禮)라 하여 제사에 올리던 차가 사라지게 되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철저하게 따르던 사대부들이었음에도 본토(중국)과 우리의 풍습이 서로 달라 차를 제사에 올리는 형식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차례에서는 여성이 차를 올리고, 남성이 술을 올렸는데 여기에서 차가 빠지게 됨으로써 자연스레 여성의 역할도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제사에는 남성과 술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 중기 이후부터 사대부 선비의 주류문화에서 결국 음료라 할 수 있는 것은 술만 남게 된 셈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보인다. 한재((寒齋) 이목이 지은 《다부(茶賦)》에 이런 구절이 있다.
搴玉甌而自濯煎石泉
흰 사발 꺼내 손수 씻어놓고, 바위틈에서 나온 샘물 끓는 모습 바라보네.
여기에서 앞 글자 건(搴)은 ‘끄집어내다’ 혹은 ‘빼내다’라는 뜻이다. 옥구(玉甌)란 흰 사발을 의미하는데, 상황에 따라 좋아하는 그릇이라 표현해도 무방하다. 특히 여기서 구(甌)란 구체적으로 완(碗)을 의미한다. 자탁(自濯)이란 ‘손수 씻는다’란 뜻이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사림 선비들은 손수 찻사발을 씻어서 물기를 닦아낸 다음에 차를 부어 마셨다는 점, 그리고 완을 사용했다는 점이 또 하나다. 옥구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모양새를 알아볼 수 있는 사료가 있다. 명나라 시대 중국 문헌인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보라. 이 책은 명 시대에 집필된 일종의 백과사전인데 왕기(王圻)가 106권에 이르도록 엮은 방대한 유서(類書)다. 지금 당신이 이 그릇을 보고 ‘어?! 이건 컵이네?’ 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은 모양새다. 손잡이만 옆구리에 달려 있지 않을 뿐, 컵의 모양새와 닮았다. 크기 역시 유사하다. 잔(盞)이라 하기에는 입지름이 10센티를 넘어가니 닮지 않았고, 사발이라 부르기에는 높이가 4센티 정도에 불과하니 적당하다 말하기 어렵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림학파들이 사용했다는 다완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자였는지, 조선 초기 잠깐 활발하게 만들어지다 갑자기 중단된 분청사기 종류인지는 밝혀내기 어렵지만, 완 형태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완이었나. 왜 차를 완에 담아 마셨던 걸까? 이 애매한 크기와 모양에, 쓰임새도 한정적인 녀석의 어디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던 걸까? 평강선생의 가르침에 따르면 완의 생명력은 중간에 있다. 사발처럼 급격하게 선이 기울지도 않았고, 잔처럼 깎아지듯 가파르지도 않다. 사발처럼 움푹하고 벽이 높아 많은 것을 담아 배불리 먹을 수도 없고, 잔처럼 그저 홀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야박함이나 매몰참도 없다. 사발은 두 손으로 내용물을 담아 들기에도 버거우나, 잔은 한 손으로 들어도 한참 힘이 남아 경박해지기 일쑤다. 그러니까 완은 너무 기울어지지도, 깎아지지도,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넘실거리지도, 야박하지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물건이다. 배를 불리기 위해 차를 마신 역사가 있었던가. 아니면 취하기 위해 차를 마신 일이 있던가. 극한의 환경에서 극한의 형태가 나온다. 반대로 온건한 환경에서 온건함이 태어난다. 산천이 맑고 깨끗하며 적당함을 버리지 않고 자라온 이 강산에서 나는 모든 풀꽃과 동물을 생각해 보라. 중남미나 동남아에서 보던 쥐가 없어 우리는 손가락만 한 들쥐를 보고 새앙쥐라 불렀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맹독을 품은 꽃과 곤충이 얼마나 있었던가.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언제나 우리 산천은 적당하고 완만하며 이따금 매서울지언정 혹독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적당하고 완만하며 조화로운 것이 우리 자연과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미감이 아니었을까. 한옥의 생김새와 치맛자락의 비율과, 담벼락의 높이와 처마의 기울기가 완벽하게 애매해서 아름다운 이유가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난 차의 역사를 벗어나서 생각한다면, 중국과 일본보다 바로 우리에게 완은 더 어울리는 물건이 아닐까 싶다. 웅장하고 거대한 것은 우리 땅에 어색하다. 너무 작고 조그만 것은 우리 성에 차지 않는다. 우리는 나기로 그리 태어났고 살기로 그리 버텨왔다. 적당한 것이라 하여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순리에 맞게 키우고 법칙에 맞게 만들어가며 살아온 모든 증거가 이 땅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나. 우리 음식, 우리 담벼락, 우리 옷, 우리 집의 적당함이 다시 배워 쓰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위로나 아래로나 지나친 것에 목매지 말아야지. 그렇게 삽시다, 우리.
글.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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