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동장윤다 차살림법
입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말장난이 생각난다. 동음이의어로 치는 장난이 유치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이 말로 시작해야겠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의 몇 절기들은 그 이름만 들어서는 어느 계절에 속하는지 아리송할 때가 많다. 사실 이 때문에 모든 계절의 길목에는 명확한 시발점의 역할을 하는 절기가 존재한다. ‘설 立’자를 써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알린다. 오늘 입동 立冬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이 글자를 들으면 왠지 나는 동굴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입동 入洞이라는 말은 평상시에 쓰는 말도 아니거니와 서로 다른 두 글자를 임의로 붙여 쓴 일종의 조어 措語에 가깝다. 입동이라는 글자를 입에 담고 몇 번 되풀이 하면 나는 겨울 이야기보다는 동굴에 들어가라는 주술적인 메시지를 생각하곤 한다. 어찌 된 일일는지.
저 먼 옛날 스페인 르네상스 말엽 사람 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세기의 걸작에 대해 구상을 했다. 절반의 분노와 절반의 절망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코미디에 가까웠다. 그 책의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이었고 세상에 대한 눈길을 고스란히 담았다. 돈키호테는 명실상부한 사회 부적응자다. 그는 엉뚱한 것들과 싸웠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일부러 보지 않았으며,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눈앞에 데려와 실존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의 기묘한 여정의 목적은 정의와 평화를 세상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뚜렷하고 확고한 삶의 목표는 수많은 비웃음과 고난 속에서도 세월을 뛰어넘어 모두가 마음으로 그를 응원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만신창이 혹은 반죽음 상태가 되어도 포기할 줄 모르던 그의 의지를 되돌리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동굴이다. 돈키호테 경은 어딜 가든 분신처럼 떨어질 줄 모르던 종자 산초 판사를 입구에 세워 놓고 수직형으로 깊게 뻗은 동굴 안으로 밧줄에 의지해 한참을 내려간다.
동굴 안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기묘한 기사의 기묘한 여행의 클라이맥스에 걸맞은 기묘한 여정이었음은 보장할 수 있다. 돈키호테는 이 동굴에서 정신을 잃고 산초 판사에 의해 구조된다. 그는 이 생생한 경험 이후 몇 번의 장황한 출정식을 이어가는 듯하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라 만차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한다. 이에 대해 세르반테스 연구의 권위자 미겔 우나무노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가장 결정적이고 탁월한 방법을 택했다고 격찬했다.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죽지 않을 수는 없으나 문학적으로는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우나무노는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 자신의 정체성을 주입하고 탁월한 서술과 상상력으로 그 생명력을 독자에게 전이시켰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독자는 오 백 년도 더 지난 작품을 읽으며 그 캐릭터의 살아 숨 쉬는 생명력에 감탄하게 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 듯하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동굴에 들어가는 일은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좋다. 동굴에 발을 내디디며 그는 비로소 죽음으로의 행진을 시작한 셈이다. 마치 불사의 존재인 것 마냥 무모하고 도전적인 자세로 내달리던 황야의 총아가 마치 현실을 이해하고 한계를 인정하게 된 셈이니까. 재미있게도 그런 그의 죽음을 향한 여정은 영원히 살기 위한 잠시의 어둡고 고달픈 과정이었을 뿐이다. 돈키호테가 죽지 않고 모험이 계속되었더라면 ‘Vivia loco y Moria Cuervo 미쳐서 살고 정신이 들어 죽다’라는 훌륭한 묘비명도 없었을 테고 그 캐릭터 또한 평범함에 그쳐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하다 잊혀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이 같은 말장난처럼 입동은 또한 겨울로 들어가는 입구다. 손발로도 이미 느껴지지만, 겨울은 모두에게 고난과 시련이 약속된 시간이다. 또한, 모두가 알다시피 이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미 떠나버린 봄의 행복을 되찾을 수도 없다. 겨울은 고난의 숲을 헤매며 목표를 찾아 떠나는 계절이고 꽤 길고 혹독한 이 동굴 안에서 우리는 쑥과 마늘로 인내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났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동굴의 시간을 이겨낼 것이고 그 뒤에는 따듯하고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이 모든 과정이 한낱 성장통에 불과했노라 위안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다다르는 것이 녹록지 않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찾아야 한다. 옆 사람, 그리고 차다.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마침내, 차다. 아, 얼마나 위안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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