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동장윤다 차살림법 02
봄 절기를 살피다 보면 옛사람들이 겨울 엄동설한에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설날이 오기도 전부터 입춘이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더니 새해에 들어서는 얼음이 녹아 계곡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며 호들갑이다. 언뜻 보면 양치기 소년 같은 이 봄 절기 이야기의 한 가운데 경칩이 있다. 이맘때에 이르면 그 이름에 걸맞게 벌레나 개구리 따위가 겨울잠에서 깰 것 같은 날씨의 연속이다. 낮에는 영상으로 올라간 기온에 활동하기 알맞고, 며칠에 한 번 찾아오는 추위 다음에는 반드시 엊그제보다 더 따듯한 날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확신이 생긴다. 그런 확신하는 마음이야말로 정말 봄의 온도에 알맞다. 옛사람들은 경칩이 되면 첫 번째 천둥이 치고 그 소리를 들은 ‘벌레’들이 ‘깜짝 놀라’ 땅에서 기어 나온다고 생각했다. 천둥이 치려면 비구름이 쌓여야 하니까 메말랐던 땅에 단비도 왔을 것이고, 비가 더는 얼음이 되지 않으니 싹도 움텄을 것이다. 먹을 것들이 온 땅 위에 생기기 시작했으니 개구리가 잠만 자고 있을 이유가 없다. 겨우내 배곯았던 아이들도 덩달아 뛰어나가 녀석들이 뿌려 놓은 알을 집어 먹던 때도 지금이다. 한 단계 한 단계 연결되는 자연의 섭리가 신기하기도 하고, 이맘때쯤이면 으레 개구리나 도롱뇽의 알을 먹었다는 세시풍속의 유희적인 면도 재미있지만, 경칩이 사람들의 삶에 던지는 의미는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간다.
당신도 긴 잠에 빠졌다 깨어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긴 잠에서 깨는 일은 평소에는 느껴볼 일 없는 독특한 경험을 준다. 관절은 녹슨 것처럼 삐걱거리고, 근육은 아직 잠에 취한 듯 몽롱해서 손아귀에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눈은 흐릿하고 귀는 멍하며 냄새나 미각도 마취한 듯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신체의 삐걱임은 한동안 이어진다. 그러다 차차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활력이 돌고 몸은 완전히 깨어난다.
얼핏 보기에 잠과 깨어남, 멈춤과 움직임은 제각각 나뉘어 단계별로 바뀌는 관계같다. 마치 시계 시침이 0에서 1로 옮겨가는 것처럼. 하지만 잠에 빠졌다 깨어나는 사이 안 보이는 틈으로 뭔가가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마치 얼어붙은 대지에 누구도 모르는 사이 햇빛이 스며들어 차곡차곡 에너지가 쌓이고 이윽고 일어나기 참 좋을 때구나 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봄이 깃드는 땅 아래의 일처럼, 몸을 깨우고 마음을 일깨우는 일로 차 마시기 만한 것도 없다. 차를 마시려면, 지난 입춘 날 나눈 이야기처럼, 우선, 차수건을 펼지자. 찻자리 수건을 편다는 것은 당신의 마음의 스위치를 켠다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나 맥락 없이도 오늘도 나는 차를 마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준비를 하는 거다. 차수건을 펼쳐 두었다면, 이제 다음 해야 할 일은 찻물 준비다. 당신은 찻물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을 거다. 생수를 주문해서 창고나 부엌 한 귀퉁이에 보관하고 있었든, 큰 물독에 길어 놓은 물을 붓고 충분히 잠을 재웠든 이제 쉬고 있던 녀석을 깨워 움직이게 해야 한다. 당신은 주전자 혹은 화로에 물을 붓고 센 불로 달구기 시작한다. 흔히 물은 가만히 있거나 끓어서 펄펄 넘치거나 둘 중 하나라 쉽게 넘겨짚고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차가운 물을 용기에 넣고 불을 켠 뒤 삐익 하는 소리가 들리면 불을 끄는 일만 반복해 왔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고 있던 물을 깨워 움직이게 하는 사이에도 물은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불의 간섭을 무시하는 듯 잠잠하기만 하던 물은 서서히 위아래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위치를 바꾼다. 이 과정을 조금 더 반복하다 보면 중력을 거스르는 마법 쇼를 보게 된다. 기포는 바닥에서부터 천정으로 방울방울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마침내 펄펄 끓는 지점이 오면 물은 용기 속에서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는데, 그건 마치 달리는 아이의 심장과 같다. 온 힘으로 달려 결승점을 통과한 아이는 곧바로 멈춰 서게 해서는 안 된다. 천천히 걷게 해서 심박수를 천천히 떨어뜨리듯, 불의 세기도 점점 줄여주는 편이 좋다.
모든 준비과정이 끝난 물은 사실 잠들어 있던 때의 모습과 겉보기로는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고요하고 언제 그렇게 날뛰었던가 싶을 정도로 얌전하다. 하지만 이미 물은 모든 준비를 끝마친 까닭에 뜨겁고 맹렬한 기운을 안에 감추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하다.
얼어붙은 땅 위로 햇볕이 스며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매서운 한파 한가운데 입춘이라는 말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도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찻자리를 펴기로 마음먹기란. 차를 마시려고 수건을 펼쳐놓아도 여전히 서성이는 마음을 찻자리에 제대로 앉혀 놓을 힘은 물에서 비롯한다.
얇고 가늘며 쉽게 부러지는 차이파리에서 만족스러운 맛과 향을 얻으려면 물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확신은 쉽게 얻기 어렵기에 노력이 필요하다. 물의 신변 확인이 필요하고, 출처가 궁금하며, 어디에 의지해 끓일지를 온전히 당신이 결정해야 한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일 것인지, 얼마나 강한 세기로 조절할 것인지도 당신의 몫이다.
가끔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피곤하고 괴롭다 느껴지겠지만, 그 모든 과정을 매일 겪어내다보면 눈대중은 정밀해지고 손끝은 야물어지고 속내는 여물기 마련이다. 차 우릴 물을 준비하는 그 마음으로 어딘가 막막히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당신이 그 안으로 들어갈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개구리가 겨울잠을 깨듯, 차를 마시고, 차수건을 거둬들이고,생각의 잠을 깨워 몸을 움직일 때다.
롤링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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