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동장윤다 차살림법 06
예전 일본의 우라센케와 교류전을 했을 때였다. 그날 모두살림에 참석한 귀빈 한 분 한 분은 자신과 함께 할 보듬이를 소개 받아 여기에 차를 담아 순서에 맞게 마시는 경험을 했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귀빈들은 두 잔은 차를 마셨다. 분위기는 장엄했고 표정들은 한결같이 가벼웠다. 공간은 협소했지만 함께 한 이들은 새롭고 귀한 우리의 차살림에 식견이 한층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입을 모았다. 하지만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한 남자에게 누군가 물었다. “오늘 찻자리가 어떠셨나요?” 그가 이렇게 답했다. “다 식어 맛도 없는 차를 마시라는데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겠던데요.” 어느 대학의 차 관련 학과 교수였던 이 남자의 대답을 듣고 빵 터진 우리는 정말 크게 웃었다. 그분께 나는 셰익스피어의 이 구절을 참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헛소동>에서 클라우디오가 말한다 “걱정말아요. 우리의 사랑이 제대로 된 보답을 받을 때까지 시간은 목발을 짚은 채 아주 천천히 흐를거에요.”
차를 즐김에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바로 마시는 그 순간이다. 조금의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차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차를 정리하는 과정까지 모두 오직 이 순간을 위한 것이다. 굳이 액체 한 모금 마시기 위해 무어 이리 번잡함을 감수하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적절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말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질문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 중에 번잡하지 않고 손이 가지 않는 것은 없다. 남녀를 불문하고 미인도, 음식도, 꽃과 나무도, 동물도, 심지어 좋은 공기와 깨끗한 물도 여러 과정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름답게 남을 수 없는 법이다. 아니면 애초부터 아예 손도 대지 말던가. 하지만 우리는 마치 금단의 사과나 판도라의 상자처럼 아름다움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이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심과 존재를 파악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한 찻자리이니 우리는 어떻게든 맛있는 차를 만들어 마셔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을까. 일단 차살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펄펄 끓는 상태에서 약한 불로 줄여 십여 분을 더 풀어 놓았던 물을 식힘그릇에서 10도 가량 식힌다. 우림이에 천천히 따라 부었던 물이 노오랗고 맛있는 찻물이 되었을 때 다시 식힘그릇으로 되붓는다. 따듯한 물로 미리 데워 놓았던 보듬이에 차를 옮겨 담고 양 손바닥으로 보듬이를 감싸쥔다. 표면의 질감과 차가 담긴 내부의 색깔을 감상하며 먼저 코로 향을 음미한다. 후 불어대는 숨결에 향과 정취가 섞여 날아가지 않도록 적당히 뜨겁게 마시기 좋은 온도를 찾아 마신다. 다 마시고 비어 있는 보듬이에 남은 잔향을 음미한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온도를 되찾아 가는 보듬이의 잔열을 느끼며 다음 잔을 기다린다. 마치 와인을 전용잔에 담아 마시는 것처럼 우리차를 우리 그릇에 담아 마시며 즐기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다. 혼자 마신다면 여기에서 끝이겠지만 둘 이상이라면 여기에 정겨운 정취가 더해진다. 문신問訊은 차를 권하고, 감사를 표하는 상호 소통의 언어다. 언어지만 말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신은 말로 소리내어 여쭙기도 하고, 눈빛과 표정으로 손님과 소통하기도 하는 인사법이다. 상대를 보면서 말없이 눈을 맞춘 뒤 눈빛을 거두면서 살며시 이마를 숙이는 이 행위에 대해 누군가는 말로 다할 수 없거나 할 필요 없는 감정들을 서로 교환하는 일종의 영혼간의 대화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누군가가 당신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대우하고 있다는 증거임은 분명하니 기분 좋게 받아들여도 좋다.
하지만 이전의 웃음 나던 그 상황처럼 피치 못할 상황으로 식어버린 차를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다.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 혼자 마시거나 둘 혹은 서너 명이면 일어나지 않을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당혹스럽고 누군가는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당혹함은 처음의 경험이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기분 나쁨은 달래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답해야겠다. 당신이 기분 나빠할 필요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권위의 힘을 존중하고 따른다. 왜냐하면 권위란 많은 경우에서 앞선 경험의 누적치가 내놓은 문제의 답안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왜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가란 질문에 대해 앞선 누군가의 성공한 실험이나 노력이 여기에 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 교수님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세상에 차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승려들을 한데 모여 산속에 살게 했던 백장선사 시절로 거슬러 가 보자. 백장선사는 규율이 느슨하고 육체가 편안했던 시절을 살던 승려들에게 몇 가지 무리한 요구를 했다. 한 데 모여 살고, 육체노동을 빼먹지 말 것이며, 시간을 철저히 준수하라고 말이다. 이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차를 생각했고, 그렇게 최초의 차법이 만들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함께 마시는 첫차에서 시작하여 외부의 손님을 대접하는 차법, 스승을 모시고 펴는 차법,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차법 등등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했던 차법은 일종의 축하자리에 펴는 차법이었다. 법명을 받거나, 큰 공부나 수행을 성공적으로 치러 모두가 축하하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큰 스님부터 막내까지 모두가 한 공간에 모여 순서대로 앉아 차를 마셨다. 차는 큰 스님부터 막내까지 순서에 따라 들여온다. 그러나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많은 인원이 한데 모여 차를 마시는데 먼저 받은 큰 스님이 막내의 찻잔이 들어오기도 전에 목마르다며 원샷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아주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기리는 큰 규모의 찻자리에서는 식은 차를 마시는 일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차가 식고 한참의 기다림의 끝에 한 모금의 차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맛과 향은 식어 사라졌을지 몰라도 뜻과 의미는 더 진하고 깊어진 차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자신과 동일한 가족이자 귀한 존재로 인정하고, 아랫사람은 송구스러움을 고마움으로 마음 안에 바꾸어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식은 음식에서 따듯함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찻자리는 끝없이 움직이고 말하며 살아가는 역동적인 일상 안에서 몇 안 되는 느림과 기다림의 순간이다. 물론 의식이 깨어있다는 전제에서 보자면 잠을 제외하고 거의 유일한 순간일 수도 있다. 백장선사의 가르침이 주는 아름다운 점 중 하나는 인간은 모여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배려하며 기다리고, 또 천천히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경험도 해 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면 결국 상처도 실수도 줄어드는 셈일 테니까. 왜 그러한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식은 차가 그저 중국집에서 식전에 마시는 뜨끈한 차랑은 다르다는 걸 헤아리지 못했을 리 없다. 오직 기다림만이 이제까지 공들였던 모든 과정을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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