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23장
차살림 준비
_찻물 中
노자의 《도덕경》 여덟 번째 장에는 물에 관한 좋은 생각이 담겨 있다.
“가장 훌륭한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만 하지 다투지는 않고, 주로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이러한 덕을 지닌 사람은 살면서 낮게 사는 것을 잘하고, 마음 씀씀이는 깊고도 깊으며, 베풀 때는 베풀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말씨는 믿음이 있다. 정치를 하면 물 흐르듯 하며, 일할 때는 능력에 맞고, 움직일 때를 잘 살핀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 과제로 받았던 ‘가훈 쓰기’에서 아버지가 적어주신 문장이 다음과 같았다.
‘은혜를 받았으면 잊어버리지 말고, 은혜를 베풀었으면 생각하지 말라.’
정말로 이것이 우리 집 가훈이었는지 아니면 당시에 아버지 머릿속에 맴돌던 문장이 마침 이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오랫동안 이 문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궁금했던 나는 도덕경의 한 구절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 물과 같이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본받을 만한가 하고 새삼 느끼면서 동시에 어째서 오랜 시간 동안 역사적으로 차인들은 차를 다룸에 있어서 물을 왜 소중하게 여겼는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초의는 《동다송》에서 ‘차는 물의 정신(神)이 되고, 물은 차를 제 몸(體)에 살게 한다. 좋은 물이 아니면 물의 정신이 나타날 수 없고, 좋은 차라야만 물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라고 한다. 차의 성품에 관한 고전적인 해석인데, 당나라 시대 육우가 한 잔의 차를 만들기 위해 찻잎만큼이나 물을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 이후부터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그저 알맞은 미네랄의 조건을 갖춘 물이 아니라면 맛있는 차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화학적 공식에 맞는 말일 뿐 아니라, 비유적으로도 좋은 말이다. 마치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 간의 관계에 대한 현대 정신의학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몸과 마음의 상관성에 대해 동의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에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My life, a wreck you're making (내 인생, 당신이 만들어 내는 난파선), I'd gladly surrender myself to you, body and soul (나는 기꺼이 당신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겠어요.’ 사랑의 완성이 곧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면, 훌륭한 차의 완성 역시 알맞은 물과 그에 걸맞은 차의 멋진 조합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좋은 찻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좋은 찻물을 구하는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여행서처럼 육우는 자신의 책에서 물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여러 방법을 소개해 놓았다. 육우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도 그 자체로 완성된 물을 최고로 꼽았지만, 옛사람들이 그깟 물 한 바가지 구하기 위해 만 리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지금에야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구해오겠다고 말하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꾼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당시에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변질과 부패라는 변수 때문에 물을 길어올 수 없었다. 육우는 차 한 잔의 완성을 위해 24가지 다기를 꼭 참석하고 닦고 익히라는 타협 없는 보수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여력이 없는 이들을 위한 몇 가지 예외를 마련해 놓기도 하는 따듯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물과 관련해서 그러한 면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당나라 전국에서 손꼽히는 물 명승지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그곳에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당신의 뒷동산에서도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좋은 물을 조건을 설정해 두었다. 가령 고인 물보다는 흐르는 물이 좋다든지, 크게 흐르는 것보다는 작고 졸졸 흐르는 것이 나은 편이라든지, 흙바닥보다는 돌을 차고 흐르는 물이 좋다든지, 심지어는 돌의 색깔에 따라 낫고 덜한 정도로 설명해 주었다.
좋은 물의 조건은 물리적인 정도 차이에서 결정 나는 셈이지만, 이를 알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옛 차인들은 한결같이 타인을 위하는 따듯한 성품을 지녔다. 초의의 말처럼 좋은 차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좋은 몸인 물과 훌륭한 정신인 찻잎이 함께여야 하지만 둘은 따로 떼어내 각각 다스리기 어렵고 결국 하나로 이어진 것이니 훌륭한 성품과 굳건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몸도 마음도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셈이다. 다도(茶道)란 한낱 주전자에 물 끓여서 찻잎 넣고 우려서 마시는 호사가의 취미 이상이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마치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처럼 향상심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이를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일이 차였기에 도구 하나에도,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붙였다. 그러니 좋은 찻물은 결국 최소한 물리적인 조건을 갖춘 물에 이를 다스리려는 이의 마음가짐과 습관, 노력이 곁들여진 결과물일 것이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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