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10장
차살림, 자리수건 펼치기
차살림을 여는 길눈이는 시작하며 자리수건을 편다. 수건의 앞자락 양 끝을 두 손으로 집어 들어 손님을 향하여 살짝 던지듯이 펼친다. 이 동작은 살풀이춤을 본보기로 삼아 응용하여 만들어졌다. 살풀이춤에는 의뢰자의 액(厄)과 살(煞)을 막고 풀어주어 편안해지기를 염원하는 뜻으로 흰 수건을 던지는 춤사위 장면이 있는데, 이 행위를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살풀이춤은 ‘그 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에서 무당이 추는 즉흥적인 춤’이며 이를 도살풀이춤 혹은 허튼춤이라 불렀다. 1903년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 중 하나였던 한성준이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라는 말을 처음 썼는데, 이후 1934년 자신이 세운 ‘조선음악무용연구소’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2년 뒤 1936년 부민관에서 ‘제1회 한성준무용발표회’를 개최하였고 공식적으로는 이것이 살풀이춤의 첫 등장이다. 정확하게는 그 이름의 등장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살풀이춤은 기방에서 다루는 하나의 기예였다.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따르면 이는 기생의 기예로 ‘남중속무(南中俗務)’ 중 하나로 ‘살푸리’로 불렸다. 남부지방의 민속춤에 전라도 시나위권의 무악 가락 이름 중 하나인 ‘살푸리장단’이 결합 된 것이었고 재미있게도 이를 기방에서 세련되게 다듬어 무용으로 받아들였다. 액이나 마가 끼어 상대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살을 다스리는 춤이라면 왠지 엑소시스트나 악마들에게 참교육을 시전하는 키아누 리브스 같은 사람들과 관련 있을 것 같지만 기녀들이라니 조금 생소하다. 사실 이들과 살풀이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고려 시대까지 성행했던 살풀이는 당시 무녀들의 신내림을 돕기 위한 춤이었다. 조선 시대로 접어들며 다양한 민속 행위들이 단속의 대상이 되었고, 무녀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능을 살려 관아에 속한 기녀인 관기(官妓)가 되거나, 전국을 떠도는 사당패에 속하게 되었다. 관기들은 대에 걸쳐 살풀이의 풍속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지만 사당패들은 이 의식을 꾸준히 전승해왔다. 조선 후기에서 말엽이 되었을 때 이 사당패들 역시 여러 가지 생존의 문제가 겹치며 민간에 흡수되기 시작했고 기녀로 전직하게 되며 이 의식은 춤이라는 형식만 남고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다. 마침, 이 춤사위가 아름답고 대단히 극적인 까닭으로 –급격한 움직임으로 만드는 극적 효과가 아니라 반대로 멈췄다가 일순 움직이는 방식의 정중동(靜中動)으로- 살풀이춤은 그 명맥을 이어갔다.
살풀이를 추던 기녀 모두가 기방에 속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1927년에 태어난 김숙자(金叔子)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이었는데 이곳은 당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당패의 본거지였고 당시 예능인들을 국가에서 관리하던 재인청(才人廳)이 있던 곳이다. 그녀의 아버지 김덕순은 갓 여섯 살 된 딸에게 판소리, 가야금, 그리고 각종 춤사위를 가르쳤다. 식민지 시대였던 까닭으로 강제노역을 피해 근처 산 깊은 곳에 굴을 파고 숨어들었고 부녀는 그곳에서 600일 동안 밤낮으로 기예를 닦았다.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몇 번이나 죽어버릴까 싶었다는데, 홀로될 아버지가 가엽고 또 그녀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자 소리꾼은 그만두고 춤만 추도록 허락하여 겨우 그 시간을 견뎌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한 가락을 가지고도 만 번은 하여야 춤집이 생기고 춤에 살이 붙는 법이니 춤에 전력해 보거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전력하게 된 것이 도살풀이춤이었고 이것이 오늘날 살풀이춤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현대에 전승되는 살풀이춤은 총 세 개의 계파로 나뉜다. 하나가 교태로 유명한 이매방류, 둘째가 한성준의 손녀로 서울시 무형 문화재가 된 한영숙류,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김숙자류다. 김숙자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고 그녀의 살풀이춤은 무대에서 보면 굿에 가깝고, 굿에서 보면 무대에 가깝다고 평가되는데 이는 나머지 살풀이춤에 비해 가장 원시적이고 원형에 가깝다는 뜻이다.
우리가 자리수건을 펼치며 떠올리는 살풀이춤은 김숙자의 것에서 왔다. 그리고 그 춤사위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애원함이 있다. 다른 부류가 보다 정제되고 세련되어 우아함으로 진화하거나 교태롭기로 다른 길을 나섰다면 여기에는 이 춤의 본래의 목적이 뚜렷하게 녹아 있다. 살풀이의 악곡은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무굿에서 나왔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극복하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무(巫)에서 살은 중국의 것과 조금 다르다. 중국의 고서 <집운(集韻)>에 기록된 살은 흉신의 개념이라면, 고려시대에 받아들인 살(煞)은 살(殺)이 아니라 흉악한 기운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살이 끼는 것은 곧 흉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이니 그것이 곧바로 죽음에 이르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 길에 가까워지는 것이니 마치 공포영화의 장르 차이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살은 인간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고, 정신을 옥죄여 오며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가장 무서운 점은 이러한 살은 언제 어디서 찾아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집안의 온갖 살림살이 중에서 신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여덟 군데가 있는데 하필 좋지 않은 때에 공교롭게 거기에 서 있다가 살을 맞기도 하고, 상가(喪家)에 갔다가 상문살(喪門煞)을 업어 오기도 한다. 반대로 기쁨만이 넘쳐흐를 것 같은 잔치에 갔다가 돌아와 괜스레 몸이 불편하거나 아프기도 하다. 언제 어느 때에 찾아들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걱정을 둘러메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큰 공포일지 상상이 가는가. 더욱 흉악한 점은 이러한 살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살을 두르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대인관계에서 살이 번지기도 한다. 가장 황당하고 답답한 것은 이러한 관계에 관한 살 중에 가장 흔하고 악독한 것이 부부 사이에 생기는 살이라는 점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가장 흉악한 살이 생긴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그렇다고 너무 불안에 잠식되어 떨 필요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살풀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생긴 살을 해결하는 일이 큰 근심은 덜 수 있으니 다행이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딱히 반길 만한 것도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놀랍게도 살풀이는 해결을 위한 행위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선이 아니다. 살풀이는 예방의 개념에 더 가깝다. 살풀이는 막상 닥쳐서 고통스러워하고 불안함에 이미 잠식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혹은 겪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는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러니 살풀이는 일생에 한 번 하고 마는 일이 아니라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의 차살림에 살풀이춤을 훌륭한 상징 중 하나로 받아들이게 된 까닭이다.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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