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6화
당신은 오늘 차를 한 잔 마시게 될 것이다. 건강해지기 위해서? 아니면 어젯밤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한 잔 걸치고서 속이 더부룩해서? 색다른 맛과 향을 원하니까? 어느 쪽이든 다 좋지만 육체보다 마음에 관련한 이유라면 더욱 좋겠다. 요즘 같은 때만큼 차가 더 고맙고 소중한 적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요즘 일상을 그리워하며 산다. 지겨웠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제발 다시 찾아왔으면 하고 바란다.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당신은 회사를 나가고, 운동하러 헬스장이니 테니스장도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레스토랑을 찾아 입맛을 돋우고, 친구들을 만나 술 한 잔 나누고, 뒷산이든 바닷가든 넓은 들판 어디든 한가로이 산책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 일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갇혀있는 날이 하나 둘 늘어나다 보면 몇 가지 문제들이 생기는데, 언뜻 사소해 보였던 문제도 반복되다 보면 몸서리 쳐질 만큼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삼시 세 끼를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을 내내 차려내는 것, 마스크 없이는 눈칫밥을 견디기 어려워 집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는 것,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초대받고도 고민해야 하는 부끄러움 같은 일들도 생긴다. 반복하는 일에 우리는 쉽게 길들여져 있지 않다.
이럴 때 나는 차를 마신다. 좋은 찻자리는 매일 가지는 찻자리다. 무엇이든 한 번에 그치면 자극적이고 흥미로울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바램이 깃들지 못한다. 나는 좋은 찻자리란 바램을 담아 이루어질 때까지 약속한 바를 매일로 반복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가능한 이유를 굳이 어려운 곳에서 찾을 필요 없다. 바램과 약속, 그리고 실천이라는 세 단계의 과정은 심리학적으로 검증된 자기 극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높은 경지를 이룩한 현자들이나 수도승들은 이 방식을 통해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이른바 삶의 구석구석을 일관성이라는 실로 꿴 인간이 되는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니까 말이다. 살면서 많은 이들이 마음의 건강을 이룩하기 위해서 차를 선택했다. 물론 알고보면 차는 그저 도구일 뿐이지만 이를 통해 오늘이 건강하다면 내일도 건강할 것이다. 반복이 좋은 습관이 되고, 좋은 결과도 바랄 수 있다면 요즘 같은 때에는 이보다 더 의지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마시거나 즐기는 차는 아주 오래 전부터 다양한 민족의 다양한 문화적 습성들이 융합한 결과다. ‘차’라고 하면 으레 조용하고, 차분하고, 명상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그래서 따분하고 지루해보일지도 모를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딱히 거짓인 것도 아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내려 온 습속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차는 본래 사람을 살리는 도구였다.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목숨을, 나중에는 수행자들의 정신을 구원하는 도구였다. 후자의 경우는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비롯했다. 그리고 불교의 발달과도 맥을 같이 해 왔다.
중국에서 불교가 처음으로 번성한 때가 언제일까. 양쯔강 북쪽에 4세기 후반 경 등장한 위나라 때 부터였다. 위나라의 통치자들은 인도의 쿠샨왕조처럼 불교를 열성적으로 옹호했다. 이들은 중국의 한족 입장에서 오랑캐로 분류했기 때문에 문화적 열등감이 대단했는데 이를 그대로 두고서는 효과적인 지배가 어려웠던 까닭으로 불교를 정책적인 차원에서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한족의 입장에서 불교는 외래 문화였다. 이에 5세기 무렵 산서성의 운강지역에 거대한 석굴사원을 세우고 불상을 건축한다. 그리고 대중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관세음보살 신앙을 유입시키고 그 자비로움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은 사실 인도 본래 불교에 없는 존재다. 중국불교에서 만들어 낸 새로운 존재이고 상징이었다.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도교 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타라 여신과 힌두신인 아발로키체스바라 두 신적인 존재를 섞었다. 그렇게 관세음보살이 만들어졌다. 이 모든 일은 의도적으로 벌어진 정치적 소산물인 셈이다. 불교는 인간을 희망의 존재이자 동시에 절망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깨달음을 얻도록 예정된 존재면서 동시에 삶의 매순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존재라 설명한다. 그들에게 도움과 위안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목표를 한동안 보류하고 있는 ‘절반의 신’이 바로 보살이다. 그리고 그 보살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존재가 관세음보살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신들의 숫자는 점점 많아진다. 수많은 보살과 부처들이 그들의 무한함과 신통력을 보여 주기 위해 세상에 탄생한다. 상상력의 소산이다. 일반인들은 관세음보살의 자비, 미륵불의 은총을 입기 위해 이름을 외우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떠나면 해가 지는 저 너머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가장 혜택을 누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스님들이었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스님들은 사람들의 한 오라기 희망을 인질로 삼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까지만 해도 불교와 스님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바와 많이 달랐다. 수행 하는 방법도 확실하게 정해진 게 없었고, 법당이라는 존재도 애매했다. 스님들은 세속에 내려와 백성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학식이 높았고, 구름과 같이 따르는 신도들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권력이 뒤를 따르게 된다. 차는 귀하고 신성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스님들은 과시와 위엄의 목적으로 차를 이야기했고, 오래 걸리지 않아 당나라 권력층을 대표하는 차인들로 성장한다. 권력을 쥐니 첩이 생기고, 여자가 생기니 아이가 태어났다. 가족이 생기니 재물에 더 구미가 당기고, 재물을 위해 더 많은 이들을 핍박하게 되었다. 이윽고 845년 당나라 황제 무종은 불교 박해칙령을 선포했다. 4만 4천 6백여 곳의 절이 허물어진다. 그리고 26만 5백 명의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되어 일반 백성이 되었고, 15만 5천여 명의 노비들이 정부로 몰수되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26만 명의 승려에 노비가 15만 5천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스님 한 명당 노비가 평균 0.6명이었다는 셈이다. 당시 대부분의 유력한 승려들은 걸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노비들이 끄는 가마에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박해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종파 중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종이다다.
박해칙령이 떨어지기 30여 년 전 열반에 든 한 승려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그로부터 불씨가 되살아난 셈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종 불교의 대통을 계승하던 참된 수행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문란해진 불교와 헤이해진 스님들을 단속할 목적으로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차와 관련된 여러 일들을 개인의 수행과정에서 반드시 실천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백장 회해 스님은 자신의 스승의 스승에서부터 내려오던 가르침을 떠올렸다. 진리란 반드시 일상의 삶 속에서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이기만 하던 당시 승려들은 이 가르침을 악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들이 했던 일은 방종이지 수행자의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백장은 자신의 아래에서 가르침을 열망하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일일불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풀이하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계율이다. 제자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눈썹 허연 큰 스승이 밭에 나가 매일매일 자신이 먹을 곡식과 채소를 기르기 시작하자 절에 딸려 있던 밭을 서로 나누어 경작하기 시작한다. 꼬박꼬박 정성을 다해 기르고 거두어들인 결과물로 1년 치 식량을 채우고, 남는 것은 100리 밖으로 들고 나갔다. 깊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때 아무도 모르게 굴뚝에서 연기 나지 않던 집을 골라 남은 식량을 몰래 두고 오도록 했다. 일 년의 네 시기를 정하여 석 달은 선방에 앉아 목숨을 걸고 참선을 하도록 시키고, 석 달은 세상에 나가 중생들 사이에 섞여 공부하도록 정했다. 이와 같은 모든 수행생활을 위해 백장은 승려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참선하고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선원을 짓고 보급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지켜야 할 원칙 열 가지를 정한다. 그것이 백장선원청규百丈禪院淸規다.
이 백장선원청규의 맨 앞, 첫머리에 차와 관련된 법규가 있다. 이른바 차를 마시는 자리에 임하는 법에 관련된 부분이다. 이 안에는 초대받은 자리에서 앉는 법, 차 내는 법, 마시는 법, 감사하는 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백장선사의 날카로운 눈은 사실 그들 중 ‘예당퇴위禮當退位’라는 개념에서 번뜩인다. 백장은 매일 아침 네 시 무렵 예불을 드린 후 모든 승려가 한 자리에 모여 차를 마시도록 가르쳤다. 규칙에 따라 나눠준 차를 마시고 차약茶藥이라 부르는 간단한 음식을 먹는 일과다. 이것이 끝나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참선을 한다. 하지만 만약 이 일과에 참석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 급한 사유를 주지에게 직접 혹은 시자, 즉 스님의 수행을 돕는 사람을 통해 미리 알려야 함을 규칙으로 정해 놓았다. 만약 무단으로 참석치 않을 경우에는 칼같이 그날 바로 절을 떠나야 함을 못 박았다. 이 서슬 퍼런 계율 아래에서 스님들은 차 마시는 종이 울리면 모두 모여 차를 마시게 되었다. 분방했던 습속의 승려들은 모두 쫓겨나고 건실한 마음으로 수행에 임할 스님들만 남게 된 셈이다.
백장의 가르침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백성들은 모두 스님을 우러러 본다. 그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열망으로 가득하다. 삶은 고달프고 부처는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을 약속했다. 그 길의 따르는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은 승려의 행동이 백성들에게 부끄러워서 되겠는가. 차가 귀한 음식이라면 승려는 귀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목적과 과정의 순수함을 따랐던 때문인지 백장선사가 세상을 뜨고서도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살던 승려들은 당무종의 서슬 시퍼런 칼날 아래서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오히려 당무종은 선종의 승려들을 일러 ‘참된 이들이다’라며 인정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차 역시 이 틈바구니 아래서 뜻을 보전하고 살아남아 오늘날을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차를 통해 오늘의 내 마음을 건강하게 돌아 볼 기회를 가져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차는 괜히 그 앞에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될 것 같아.’ 요즘같이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고 많은 변수들로 걱정스러운 때에 내 마음 하나 다잡고 돌볼 수 있는 매일의 도구가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차 한 모금 마시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그렇지. 내가 처음에 말했지 않은가.
글.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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