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2화.
직업상 어딘가로 이동할 일이 많다. 버스나 비행기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문제들이 겹쳐 자동차를 모는 일이 빈번하다. 아버지를 모시고 갈 때는 조용필과 마리아 칼라스를 듣고, 누님을 모실 때는 당신이 직접 선곡한 플레이리스트를 애용한다. 나는 음악에 관해 식견이 짧고 귀가 얇아 주로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에서는 흘러나오는 노래가 다양하지만 그래도 시절에 따라 그때그때 마치 정해 놓은 것처럼 사람들이 애정 하는 곡들이 있다. 이 계절이라면 자이언티(Zion.T)의 곡에 이문세가 피처링 한 <눈>이 심심찮게 들린다. 작년 이맘 때 나는 이 노래를 언급하며 대설을 맞이하는 오늘의 차에 관해 이야기 했다. 노래의 후반부 가사처럼 요즘 같은 날씨엔 눈 내리는 날 차를 한 잔 내어 서로 주고받기 좋다. 차는 몇 가지 조건이 서로 맞아야 맛이 좋은데,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함께 마시는 사람과 마시는 공간을 둘러싼 배경이 중요하다. 눈이 내린다면, 그것도 오늘처럼 대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펑펑 쏟아진다면, 맹물을 덥혀 서로 이마를 마주하고 마시기만 해도 즐거울 것이다.
몇 년 전 차로 봉사한 기억이 난다. 내가 살던 종로 북촌에는 한옥이 많아 그곳에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차를 내어 드리는 이벤트를 열곤 한다. 기회가 있어 그곳에서 몇 일간 일을 도왔다. 우리나라 사람이 삼이라면 외국인이 칠인데, 출신과 관계없이 대부분은 차를 잘 모르고 그곳을 찾는다. 굽고 좁은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인 셈이다. 디귿자로 들어앉은 서른 평 정도의 조그만 한옥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그 오른편에 조그맣게 튀어나온 사랑방에 앉아 나는 홀로 차를 마시곤 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봉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본디 스스로 남을 맞을 준비가 없으면 자신감도 없고 소홀해지곤 하는 류의 사람이라 그곳에 앉아 공간을 살피며 차 맛을 다독일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이것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던 것 같다. 마치 큰 미술관에서나 하는 우발적이고 생소한 행위예술을 감상하듯 사람들이 사랑채를 둘러싸고 나 홀로 차 마시는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너 댓 명이면 더는 엉덩이도 붙일 틈 없는 좁은 공간이었고, 흔한 병풍 하나 없었으며 뒤로 놓인 함函이며 농籠도 낡고 꾀죄죄했다. 바닥은 낡아 이제는 시골에서나 눈 비비고 찾아보면 있을까 말까 한 노란 장판이 깔려 있었는데 그마저도 끝부분은 들고 일어나 금세 문 밖까지 엉금엉금 기어서 나갈 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차를 마시는데 매우 사소한 것이었다. 얼음이 얼고 눈이 흩뿌리기 시작했고 그날의 차는 이제껏 마셔본 것 중 단연코 으뜸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님들도 장난감 같은 그릇이나 덜떨어진 소품 같은 것들은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도망치려는 비쩍 마른 장판을 엉덩이로 짓누른 채 오래오래 함께 차를 누렸다.
몇일 전 차를 구매하고 싶어 하는 한 애호가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차를 마셔본 경험이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가 수집가로서 일가를 이룬 것처럼 그는 차를 마셔본 경험을 수집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색으로 분류하자면 새하얀 백차에서부터 새까만 흑차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섭렵하고자 하는 의지로 분기탱천했다. 실로 그 취미가 진지하고 열성적이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차 칠백 종을 마셔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모종의 이유를 느껴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찌 연락을 하시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동장윤다가 한국에서 가장 독특하고 품위가 있다고 들었는데, 특히 내가 차를 잘 상담해준다고 들었다는 말을 했다. 금시초문이었지만 말이 재밌어 다시 물었다. “그럼 무엇을 말씀해드리길 원하시나요?” 남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이 차는 언제 먹어야 제일 맛있습니까?” 자,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는가? 우선 이 질문은 범위가 너무 넓어서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몇 시간은 떠들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럴 때는 아예 그냥 웃고 넘어가야 편이 현명하다. 설사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이 서더라도 난감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질문에서 맛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그 정의도 모호하다. 이를 위한 배경이나 필요조건이 너무 많거나 복잡해서 단정해서 답을 내리기도 어렵다. 가장 문제가 되는 단어는 ‘언제’다. 저 말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계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본인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그 ‘때’를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런 식의 애매모호한 질문을 싫어해 그저 말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끊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질문하는 사람의 그 진지함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짧은 나의 식견과 경험으로서는 드릴 대답이 간단했다. 찬바람이 불고 맨살로 바람을 부딪치기 어려워 한 겹 두 겹 걸치기 시작할 즈음이면 이 차를 뜯어도 괜찮다. 바야흐로 눈이 내리기 시작할 계절이니 밖이 잘 보이는 공간이면 좋고, 자기가 가장 좋아해서 오래 머무르는 공간이라면 더욱 좋다. 혼자 마셔도 좋지만 누군가를 바라보며 마시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이 남이어도 좋고 스스로를 좌시하며 마셔도 괜찮다. 그러자 그는 다시 물었다. 모든 차에는 나름의 법칙이 있고 최적화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런 것은 없는지를 궁금해 했다. 나는 카고노하나이레(籠の花入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후루타 오리베는 차회에 쓰는 화병 아래 깔던 판자 혹은 비단을 뜻하는 카고노하나이레를 스승이었던 센리큐 앞에서 치워버렸다. 센리큐는 그 모양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말했다. “내가 이것에 관해서는 너에게 배우는 것이 맞다.” 판자든 천조각 하나든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예민한 누군가에게는 전체의 풍경을 좌지우지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너무 튀어서거나 반대로 너무 빈약해서, 색이 서로 어우러지지 않아서 혹은 필요 없는 직선이 너무 많아서든 간에, 오리베에게 저 소품은 자신이 꾸리는 차실에 하등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없애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신감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믿는 것- 이고, 이를 위해서는 이것저것을 두루 살피며 실험해보고 적용해보는 경험이 당연하다. 나는 만약 당신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찬바람이 부는 계절까지 반년을 기다려 무르익은 차의 향과 맛이 어떠하든 온전히 즐기고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자신했다. 남자는 매우 흡족해하며 차를 샀고 또한 나는 한 통을 팔아 흡족하게 자리에 누웠다. 후에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무엇을 마시며 살았는지 잘 모르겠다며 나를 낯 부끄럽게 했고 매년 이맘때가 되면 우리차를 기다리겠노라 감사인사를 전했다.
글. 정다인
2월 중간인데 눈이 왔어요
진짜 봄이 오긴 오려나요?
피처링 문구가 반가워 댓글 남겨봅니다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