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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옳은 것과 아름다운 것 사이로 너울너울


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시작하는 글











동+(茶)




동녘 ‘동(東)’자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동서남북 방위 중 동쪽을 가리키는 것이 첫 번째다. 이 뜻풀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동차(東茶)’란 예로부터 한족의 동쪽 지역인 우리나라에서 나거나 마시는 차를 의미했다. 중국의 문화식민지를 자처했던 조선은 자랑스레 이 단어를 가져다 사용했다. 다른 대안은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동' 자에는 또 다른 큰 뜻이 더 있다. 동은 오른쪽을 뜻하기도 하고, 새롭다는 뜻도 있다. 오른쪽은 ‘옳은 쪽’에서 변한 말이고, 동시에 한자 그 자체로 옳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래서 초의는 『동다송』 안에 우리 차에 관한 짧은 의견을 펼쳐 놓았다. 거기에는 무엇이 우리에게 올바른 차인가에 관한 질문이 녹아 있다. 동다살림법의 첫 글자는 그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이다. 우리는 인류에게 옳은 것이란 무엇인가 관한 답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차를 마시는 나와 너에게 올바른 차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제안한다. 그렇기에 ‘동’은 마지막 뜻으로 새롭다는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


쿠마쿠라 이사오(熊倉功夫)는 일본 다도 역사 전체에서 사건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중세 차문화 와비(佗)고, 나머지 하나는 근대 민예(民藝) 운동이다. 그는 두 사건의 공통점을 전에 없던 미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으로 꼽았다. 변화의 시발점은 모두 눈에 보이는 ‘물건’에서 비롯했다. 와비차는 ‘예’의 형식에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일그러져 파탄 나 버린 과거를 뒤로한다. 그 자리에 조선에서 물 건너온 그릇을 놓고 이도다완이란 새로운 이름과 사용법을 부여했다.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는 새로운 지침은 이윽고 라쿠의 개발로 이어졌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비싸기 때문에 수집할 가치가 있는 것도 좋지만 가치란 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자유로운 몫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선팔도에서 불쏘시개로 쓰일 법 한 물레와 초롱,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옹기 따위를 모아 평범함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했다. 그것이 민예였다.







이제, 저 옛날의 한계를 넘어 ‘동다’의 새 국면을 열어도 좋을 때가 왔다. 동다 안에는 나와 너, 우리에게 알맞고 많은 면에서 새로운 차 마시는 이야기를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이 역시 기물의 도움이 필요하다. 와비차가 조선의 그릇에 관한 완전한 재해석에서 비롯하였고, 민예가 역시 조선의 일상품에서 아름다움의 새로운 기준을 뽑아냈다면, 동다살림법은 그 기물에 의지함을 저 멀리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조선 기물에 관한 그들의 짝사랑 덕분이었을까.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좋은 재료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주 평범하고 동시에 익숙한 것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익숙한 재료, 익숙한 질감, 익숙한 형태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결과물들을 저 안에 녹여 놓았다. 그것은 차수건에서 화로, 물을 다루는 방식과 찻잎에 대한 이해, 그리고 보듬이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곳에 스며들어 있다.






(茶)+살림



나는 무언가를 살린다는 말이 항상 무겁게 느껴졌다. 좋고 옳은 말이지만 버겁고 고민스러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살림법의 살림은 한 가정을 돌보고 아우르는 일이라는 뜻을 넘어 꼭 필요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방에게 채워주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육체적인 부분을 비롯하여 정신적인 것까지를 포함한다. 오히려 우리는 결핍이나 허전함으로 더 많은 상처와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마주하곤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나는 사소한 것에서도 더 많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더 넓고 깊은 공허함을 마주한다.


차살림법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무언가를 살리는 행위가 반드시 보살행이거나 희생이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가정을 돌보는 일이 만약 단순히 부모의 희생이라면 이 얼마나 불행한 가족일까. 나는 가정을 돌보며 위안을 얻고, 따스함을 느끼고, 때때로는 삶의 동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얼마나 크고 작은가, 자주 혹은 이따금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를 살리고 돌보는 행위는 언제나 주고받는 관계에서 비롯한다. 내가 살림법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누이가 해주었던 말이다. “혼자 마시는 찻자리라도 앞에는 나에게서 꺼내 앉혀 놓은 내가 함께 있다.” 살림은 나로 시작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선순환의 운동이다. 여기에는 거창함도 없고 억지나 눈치 싸움도 없다. 다만 스스로 의지해 매일 반복해 보라는 응원의 마음으로 법이라는 둘레만 쳐 두었을 뿐이다. 그래서 살림법이다.









동다+살림법, 옳은 것, 혹은 아름다운 것들에 관한 작은 이야기



나는 앞으로 얼마간 동다살림법에 관해 요모조모 살펴보고 크고 작은 감상을 기록해 나가려 한다. 동다살림법이 이미 익숙한 이들도 얼마간 헷갈리고 아리송했던 점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좋은 지침이 되리라 생각한다. 생소한 이들에게는 무엇이 새롭고 어떤 점이 흥미로운지를 발견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 이 새로운 차법을 만들고 가르치고 매일 되풀이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자세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다루고 이해하는지, 당신이 엿보아 준다면 좋겠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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