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20장
차살림 준비
_향香 上
믿기지 않겠지만 입추 날이다. 절기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느끼지만 우리네 피부와 중국 사람들의 계절은 한 박자씩 어긋나 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아마 한자가 주는 묘하고도 장난스러운 재미가 아닐까. 알다시피 ‘입(立)’이란 무언가를 세운다는 뜻이다. 가을을 세운다는 뜻이니 아마도 지난해 쓰러져 자고 있던 가을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는 정도로 알면 좋지 않을까. 다섯 살, 아니 이제 법이 바뀌었으니 네 살 된 우리 첫째 꼬맹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매일 아침 겪는 바로는 사람은 깨운다고 바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열돔에 꼼짝없이 갇혀 가을을 기다리는 우리로서는 꽤 힘이 나는 절기이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더운 날에는 모든 감각이 둔해지면서 동시에 예민해진다. 미각은 둔해지고, 촉각은 곤두선다. 누군가 내 살갗에 닿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오는 이런 때에 후각은 또 어떤가. 둘째 똥 기저귀로 가득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분리수거장에 내려오면 일반쓰레기들을 모아 놓는 거대한 통을 열 생각에 두렵다. 음식물쓰레기는 오죽하겠는가. 여름이면 냄새도 짙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향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온갖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 사이에서 맑고 상쾌한 향기는 그 존재가 더 귀한 법이다.
옛날 사람들은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 보면 어떨까. 평범한 인간이 하루에 한 번 샤워할 수 있게 된 지가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상수도와 하수도가 완전히 분리되어서 수세식 변기에 앉아 용변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백 년이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어렸을 적 마을 어귀를 지나가는 초록색 분뇨차를 기억할 것이다. 그 주변을 지나가며 우리는 모두 코를 감싸 쥐었다.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한 수만 년 동안 냄새는 문명과 상관없이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프랑스가 세계를 호령하던 당시에도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는 체취와 똥오줌 냄새로 가득했고 이를 가리기 위해 귀족들은 향수를 뿌려댔다. 아무리 부유해도, 아무리 잘 나가도,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냄새는 평등했다. 오늘날 중산층과 당시의 재벌 중에 누가 더 청결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에게서 향기가 난다면? 땀 냄새, 오줌 냄새, 똥 냄새, 정수리 냄새, 사타구니 냄새, 입 냄새, 피지 냄새, 엉겨 붙은 머리 냄새, 발 냄새, 겨드랑이냄새가 아니라, 향기가 난다면 그는 어떠한 존재일까. 당연히 옛사람들은 신에게서는 향기가 난다고 믿었다. 향기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문명, 모든 종교에서 향은 신에게 바치는 물건이었다. 본질적으로 향기로운 존재에게 향기를 바치는 것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 인간이 돌려보내는 신을 향한 최소한 양심이자 정성이었다. 향은 곧 말 없는 기도였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스틱 형태의 연향이든 가루 형태로 화로에 뿌리는 향목이나 유향이든 모든 향은 시각적으로 완벽하다. 정확하게는 신의 응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를 띠고 있다. 향 분자는 가볍기에 공기 중에서 아래가 아닌 위로 향한다.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다. 신들은 당연히 천상의 존재들이기에 향을 태우면 마치 나의 기도에 응답하기라도 하는 듯 신들의 거주지를 향해 향기가 나의 바람을 안고 올라간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보인다. 보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앞으로의 삶을 거기에 바칠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달마가 제자 혜가의 불안함을 내려놓으라 말한 안심 법문에서 마지막에 ‘그대는 보는가?’라고 말한 것도 진실한 믿음을 가질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향은 그렇게 종교 속으로 스며들었다. 불교도, 유교도,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도, 힌두교나 이슬람교에서도, 그리고 여타 수많은 종교에서 그 종류가 다양할 뿐 모두 향을 바친다. 불교는 육법공양의 두 번째로 향을 쓴다.
마치 연꽃이 하늘에서 온 신들의 세계 속 물건인 것처럼 사람들은 향을 통해서 인간이 신과 접촉하여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발전하며 향기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향기가 나는 물건들을 바치게 되었다. 잭 터너는 고대 지중해 지역의 모든 주요 문명의 공통점으로 이러한 향기 나는 물건에 대한 신적인 의미를 꼽는다. 그렇게 시작한 향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은 일상생활에도 스며들게 되었고, 자연에서 인공적인 향을 채취하는 일은 어렵고 그 결과는 귀한 것이기에 소수의 권력자가 독점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완성되었다. 이집트에서 먼저 시작된 이러한 향기에 대한 집착은 여호와가 모세에게 대량의 향료들을 구해 모으라 말한 이후로 서양에서 더욱 강해지게 되고, 중국은 한 무제 때 이르러서 파르티아 상인들이 가져와 전한 향을 상서로운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연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쌍영총 벽화에 이러한 향이 등장하고 있다.
그 역사가 어찌 되었든 향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재미는 꽤 신선하다. 그리고 차 역시 향기 나는 그러한 여러 신물(神物) 중 하나라는 사실도 재밌다. 당신은 제사 음식들을 보며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나? 과연 신들이 저 음식을 먹을까? 우리나라 모 예능에서 꽤 오래전에 이와 관련한 실험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비슷한 궁금함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인류는 그런 쌀과 과일, 고기와 생선 같은 직접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차원의 것뿐 아니라 향이라는 보다 멋진 물건을 활용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물리적인 형태가 없는 존재에게 물리적인 형태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귀한 존재일수록 그러한 물리적 차원을 뛰어넘는 것을 바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향이었다. 물론 향 또한 향 분자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걸 몰랐으니 이건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옛사람들에게 향은 물질적으로 소멸하는 유한한 것이 아니었다. 향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며 그 오묘한 실체를 감히 인간으로서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바로 신성이었고, 차에서 향이 가지는 위치이기도 했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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