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여행 07 :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황혼이 되어서도 늦지 않다.
춘천의 옛 이름은 소머리다. 한자가 들어와 우곡(牛谷)이 되었고, 이내 우두주(牛頭州)로 바뀌었다. 소는 이롭고 중요한 동물이었고, 지명에 머리가 들어감은 으뜸을 뜻했다. 백제 온조왕 시절이었다. 신라 경덕왕은 이 지역을 삭주(朔州)라 이름 고쳤다. 삭(朔)이란 초하루를 뜻한다. 동물 이름만 빠졌을 뿐 중요하다는 인식은 그대로 남았다. 춘주(春州)라고 바꿔 부른 것은 고려 태조 때다. 오늘도 춘천의 토박이 어르신들은 이 고을을 춘주라 부르고 있다. 소머리와 우수의 지명은 머리 또는 으뜸을 나타내고, 삭주는 처음 또는 시작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춘주는 봄(春), 고을(州)을 나타내므로 머리·으뜸·처음·시작·봄으로 연계되는 이름이다. 그리고 조선 태종에 이르러서 지금의 춘천이 되었다.
무언가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헌데 보듬이를 두 손 가득 쥐고 엄숙한 표정으로 사뭇 진지한 그녀는 시작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버거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는 많은 일을 한다. 건실한 에너지 사업체를 운영하고, 크고 작은 협회를 이끄는 리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한 여성이며, 오랜 경력의 차인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조금씩 위로 임하려 들곤 한다. 학생에서 노동자가 되고, 홀로에서 아버지가 되며 보고 느낀 바가 그랬다. 마치 임관하는 관리처럼 더 적은 머리를 위에 두고, 더 많은 다리를 아래 두려는 마음가짐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든다. 문제를 눈앞에 두고 서 있는 나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든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것들이 부담스럽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점점 나와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인생의 차오르는 저녁놀을 바라볼 나이가 된 그녀에게 이 모든 생각들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녀는 언제든 새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평밀(平密) 송양희씨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차밭 근처에서 태어났다. 또한 스님을 가족으로 두고 자랐지만 청년이 다 되도록 차를 몰랐다. 차가 그녀의 인생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이를 가지고 난 뒤부터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학교에서 나누어 준 책자 중에 다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송양희씨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차를 배울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으레 그러하듯 무언가에 관한 관심은 기회가 주변에 없으면 조금씩 그 기세가 꺾여 자연스레 사라지기 마련이다. 삼십 여 년 전 그녀 곁에는 차를 진지하게 배울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춘천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진지하게 다가설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몇 해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남들이 다른 취미를 찾아 떠나는 와중에도 송양희씨는 안에서 타오르는 조그만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이윽고 수년이 더 흘러서야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저는 공부를 정말 못했어요. 가족들은 모두 머리도 좋고, 예술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죠. 저만 아니었어요. 저는 사업을 해서 돈을 꽤 벌었지만,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게 있었어요. 저는 정말로 진지했어요. 차 앞에서는 항상.”
당시 송양희씨에게 차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차를 펼치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했다. 차법을 펴고 접는 솜씨가 뛰어나 무엇을 배워도 곧잘 익혔다. 그녀는 누구 아래서 어떤 차를 배워도 동기들이 우왕좌왕 하는 때에 이미 남 앞에 나아가 경연을 펼칠 담력이 있었다. 하지만 2세대 우리나라 차인들 대부분이 겪었던 일과 마찬가지로 차인이 차를 좋아하며 살 수만은 없는 현실이 찾아왔다. 넉넉한 재력, 훌륭한 솜씨, 담대한 성격의 그녀는 호사가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녀는 상처 입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마도 이 사건이 또 다른 시작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중일 세 나라가 서로 모여 차법을 펼치고 교류하는 대회가 있었다. 송양희씨는 솜씨를 인정받아 단체의 대표로 선발되어 경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녀는 사비를 털어 모든 기물을 직접 골라 해외로 옮기는 열정을 보였다. 경연 당일, 일본의 차법 공연 이후로 순서가 잡혔다. 하지만 담대하기 그지없던 그녀가 공연 전부터 이미 사색이 노래졌다. 아니나 다를까 본인 차례 이후 쏟아진 수많은 질문에 그녀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3자의 객관적인 시선을 빌리지 않아도 이미 우리나라 차법이란 결국 좋게 포장해도 아류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설픈 복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쁜 하루하루를 쪼개며 쏟아 부은 수년의 시간을 한탄했다.
“우리나라 차가 우물 안 개구리구나 하는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어요. 내가 이제까지 무엇을 했는가 싶은 마음이 들기 전에 우선 그 부끄러움, 망신감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다음에는 화가 났죠. 그런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 일이 있잖아요. 다 관두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도 없고, 갖출 것도 이미 다 갖추어 놨는데 포기하기 싫은 오기 같은 마음이요.”
정확하게는 오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기란 힘이 부족함에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니, 분명히 그녀는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인정에 대한 욕구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것만으로 삶을 지탱하는 인간은 매일 새벽 피곤과 잠을 쫒아내며 차를 공양하고, 수년간 이어지는 매일 기도를 올리며, 이따금씩은 천배의 절을 스스로 기꺼이 감당하며 사는 삶을 살지 않는다.
나날이 커지는 회사 규모에 하루 24시간을 쪼개 살아야 하는 본인의 입장을 설명하며 이전의 차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중년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돈수스님과의 인연으로 새로운 방식의 말차를 개발하려는 시도를 바로 곁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말차법에서 행동양식은 큰 뼈대로 두되 상징과 세부점들을 우리 정서에 맞게 바꾸고 연습하는 차법이었다. 송양희씨는 자신이 일본에 건너가 우라센케차법(裏千家茶道)를 배우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부처님 앞에서 천배를 할 때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 그녀다. 무릎을 꿇고 앞뒤로 슬금슬금 기어가는 그 몇 센티의 길은 얼마나 멀고 답답한지 정신이 아득했다. 먼지 한 톨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그 질식감에 송양희씨는 이것이 인내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마음으로 십 수 년 동안 그녀는 돈수스님의 한국말차법 전수시자로 세상에 우리나라 말차를 알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안과 겉 모두에서 조금씩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잎차의 시대를 살면서 잎차를 다스려 남에게 당당히 펼 방법이 없다면 곤란한 일이다. 더불어 차법을 펼치는 일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차생활을 위한 지식의 두께도 더 두꺼워질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평강선생과의 인연은 이를 위한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녀는 조금씩 당당해지고 있었다. 차를 배우는 일이 남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이 조금씩 커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차인연합회 강의실에서 선생을 만났다. 강의를 들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단지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선생은 이미 실현가능한 형태로 구체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생활과 차문화에서 차인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평강선생의 생각과 강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큰 흔들림을 주었다. 형식이 정중하되 보다 자유롭고, 미적으로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온전히 새롭고 동시에 아름다운 차생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오직 우리들만의 새로운 문화일 것이다. 송양희씨는 이를 위해 기물에서부터 행동양식까지 하나씩 우리의 것으로 바꾸고 채워나가는 일에 동참했다. 왜냐하면 그저 그런 이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확신 없는 말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를 만나도 내가 차를 하고 있음이 당당해요. 아주 옛날에는 내가 차를 한다는 말이 남들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때라 조금 서먹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내가 한국차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이제는 누구에게도 내가 우리나라 차문화를 배우고 임하고 있다 말해도 부끄럽지 않아요.”
송양희씨는 이제 어렸을 적 스스로에게 던졌던 그 질문을 새로이 듣는다. “지금 당신에게 차는 무엇인가요.” 그녀에게 차는 헌다를 위한 방법론이다. 그녀에게 차는 본인이 마시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부처와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봉사의 물건이다. 이를 잘 성취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성실히 가다듬고 단련할 필요로 차를 곁에 두었다. 동시에 헌다란 자유로움을 발산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많은 것들에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헌다는 마음의 죄책감을 덜고 머리를 가득 채우는 갑갑함으로부터 정신을 잠시 홀가분하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된다. 그녀는 이를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위시할 기회를 미련 없이 버렸다. 지나친 형식과 기교, 복잡한 도구는 많은 것들을 손아귀에 쥐도록 보챈다. 그렇게 쌓이기 시작하는 기물과의 관계는 지끈지끈한 두통과 고민거리를 안겨줄 뿐이다. 재물을 모은 사람은 그 곁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조금씩 누군가를 굽어 살피는 위치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그것이 단체에서의 지위든, 사회적인 위신이든, 인간관계에서의 위치든 간에 말이다. 귀하게 자란 집안의 소녀가, 당당하게 일군 중견기업의 대표가, 차와 관련하여 산전수전 다 겪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의 차인이, 마음에서 많은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직접 경험한 간절함과 자기 확신이 없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평강선생님을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자주 생각해요. 다른 건 몰라도 지금보다 훨씬 정돈되고 아름다운 차생활은 가능했겠지요. 이렇게 수많은 것들에 둘러싸일 일도 없었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제 이룩하면 되니까요. 1세대 차인들과 다음 세대 우리나라 차인들을 위해 많은 것들을 만들고 준비해놓고 떠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겁니다.”
글. 사진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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