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01
우수는 이제껏 얼어 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 물이 되는 날이다. 하늘은 얼어붙은 것들의 세상이 아니고, 땅은 촉촉이 감싸 적시는 빗방울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예년 같지 않은 매서운 한파로 꽁꽁 얼었던 한강이 이제 제 모습을 찾아간다. 더불어 풀리는 날씨와 함께 찾아온 먼지의 역습에 우리는 가만히 창문을 닫고 햇살을 안으로 들이며 찻물 끓일 준비를 한다. 불청객을 내쫓는 데 차만 한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것 아시는지.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당신도 나도 차를 좋아하고 즐겨 마신다. 공통점은 사람이 서로 가까워질 기회를 던져주고, 차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관심사를 나누며 가끔 보아도 반갑다.
우리는 왜 찻그릇으로 차 마시기를 고집하는가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차를 즐기는 점은 닮았지만, 모두가 한 종류의 차를 마시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그릇을 쓰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한 가지 방식으로 차를 마시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같은 습관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차 마시는 때와 장소, 마실 때의 기분이나 모인 머릿수는 다르지만, ‘찻그릇’이라는 문화적으로 독특한 기물을 사용한다는 점은 같다. 우리는 차를 마시는 데 밥그릇이나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한다.
찻그릇은 일반적으로 차를 담고 보관하는 그릇, 차를 준비하는 그릇, 차 마시는 그릇으로 나뉜다. 우리가 제대로 차를 즐기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적어도 세 종류 이상의 그릇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최소 세 종류의 찻그릇은 제각각의 역할이 정해져 있어 다른 일은 도무지 맡아 할 수가 없다. 신분이 귀하시다. 더구나 이 귀함은 태생부터 타고난다. 같은 단위면적 당 값어치로 놓고 보면 흙으로 빚은 찻사발의 몸값은 접시나 국사발의 서너 배에서 열 배는 훌쩍 뛰어넘는다. 찻잔은 컵보다 두세 배는 비쌀 것이고, 다관은 못해도 열 배는 값나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왜 꽤 비싼 값을 치러가면서까지 두루두루 생활 그릇으로 활용할 수도 없는 찻그릇으로 차 마시기를 고집하는가.
찻그릇은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게 하는 길잡이
찻그릇은 이름 붙은 그대로 차를 우려내어 즐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그릇이다. 차를 마시기 위해 찻그릇을 쓰는 것은 밥을 먹기 위해 밥그릇을 쓰고, 운동하기 위해 운동화를 신는 것처럼 자연스러우며 당연한 일이다. 맛있는 차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행위와 적합한 도구가 필요하고, 찻그릇은 그 도구로서 태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찻그릇을 쓰지 않고 차를 마시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알맞은 양의 찻잎을 냄비에 담고 알맞은 온도의 물을 부어 알맞은 시간 동안 우린 다음, 국그릇에 차를 따라 마신다고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우스꽝스러울 수는 있지만, ‘적합하다’라는 수식어에 ‘반드시’라는 조건이 붙지는 않는다. 찻그릇을 단지 차를 우려내고 담아 마실 수 있는 도구로 보면, 도자기 찻그릇은 유리나 공장식 용기들에 비해 비싸고 보관도 힘이 드니 덜 실용적이다. 그러나 음미의 세계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 소소한 차이로도 큰 만족을 얻을 때가 많다. 이 말인즉 반대의 경우 영 탐탁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에 십상이고, 차를 처음 마시는 경우라면 자칫 차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잘 알기 위해 더 좋은 것을 준비하는 것도 맞지만, 바로 알게 하려면 제대로 된 것을 준비해야 한다. 잘 만들어진 찻그릇은 잎차의 예민한 맛과 향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릇이되 그저 그릇이기만 한 것은 아닌
물론 음식으로서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라는 면에서 찻그릇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기는 하나, 충분하지는 않다. 세상에 존재하되 흘러버려 모아두기 어려웠던 액체를 가두고, 두 손이 비좁고 바빠 움켜쥘 수 없었던 곡식과 열매 따위를 담아 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그릇이다. 하지만 찻그릇은 그릇이되 그저 그릇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찻그릇에는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찻그릇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답을 쫓던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발아하고, 도예가의 손끝을 빌어 세상에 태어났다. 찻그릇의 본격적인 역사는 천오백여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어림잡으면 조금 더 쉽게 다가온다. 애초에 차는 액을 우려 마시는 용도는 아니었다. 즙을 찧어 쓰는 용도에서 나물로, 갈아서 통째로 끓여 마시는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차를 먹고 마시는 방법이 달라짐에 따라 찻그릇도 형태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오랜 과정 동안 찻그릇은 천 년 전의 누군가에게는 차를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팔백 년 전의 누군가에게는 삶의 안목을 넓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누군가에게는 반대로 그 안목을 성찰하는 방법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자체를 고민하게 했다. 어쩌면 한 도예가의 손에서 나온 찻그릇을 소유한 서로 다른 이들이 아름다움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글로 쓰고 이야기했을지 모른다. 반대로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진 그릇에서 공통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생활의 축도를 세우는 누군가도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나와 모든 사물의 안과 밖과 그 사이에 있지만, 동시에 밖에 그대로 두고 보아야 하거나, 안에 들여와 액자에 넣어 걸거나 장식장 위에 올려두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매일 손으로 쥐고 감싸고 다루는 미술품으로서 찻그릇은 독특한 힘을 가진다. 늘 곁에 두고 사용하는 아름다운 찻그릇은 아름다움 자체를 탐구하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아름다운 것을 쫓지만 갈피를 잡기 어려운 세상 사람들에게 찻그릇은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좋은 선생이 되어 준다.
여기에 더해 찻그릇은 아름다움을 담는다는 의미를 넘어 사용하는 이의 습관과 마음가짐을 보듬기까지 한다. 우리는 매일 매일 차를 우리고 마신다. 같은 행위를 매일 빠짐없이, 온전히, 스스로, 기꺼이, 반복하는 일이 그 외에 또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찻자리는 나 스스로, 혹은 가족끼리 서로 다독여주는 자리이다. 차 마시는 자리는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혹은 그렇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자리이다. 그 자리를 위해 태어난 찻그릇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것은 마치 신께 꽃을 올리고, 사랑을 맹세하며 반지를 나눠 끼는 것처럼 상징적인 행동이다. 꽃이 신을 위한 선물이고, 반지가 상대라는 관계를 위한 선물이라면, 찻그릇은 나를 위한 선물인 셈이다. 살짝 거창하지만 그럴만한 의미 있는 사치라고 말해도 괜찮다. 그러니 매일 마음을 담아 차를 마시는 당신에게 찻그릇은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릇인 셈이다.
찻그릇은 왜 특별한가. 짧은 이 한 꼭지 글에서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참으로 상쾌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진지함은 시간으로 빚어진다. 궁금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 누구도 답해주지 않았던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시간을 들여 조금씩 생각을 진전 시켜 보기로 했다. 얼음이 물로 바뀌는 이맘때를 시작으로, 고정관념처럼 단단히 얼어있던 찻그릇에 대한 생각도 흐르는 물처럼 유연해진다면 좋겠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걸작과 범작 중에서 골라 펼치는 이 이야기가 열린 마음으로 차를 즐기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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