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05
입지름 11.3센티, 높이 약 6센티. 이 그릇은 누가 보아도 국그릇이다. 혹은 나눠 먹을 국물 요리나 찌개를 담을 딱 그런 그릇이다. 무더운 뙤약볕에 지친 저녁 김치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물김치 한가득 담으면 둘이 먹기에 어울리는 그런 크기다. 입지름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높이는 누가 보아도 튼튼해 보여서 끼 부리기보다 한 끼를 책임져줄 것 같아 든든하다. 노리고 만든 것이 아니기에 전이 다소 기울어져 있어도 자연스러운데 백토가 색이 바래며 흘러내리는 선의 균형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널찍한 굽의 크기가 당당한 와중에 무식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유약 한 가운데로 몇 개의 손자국이 남아 태토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가만히 놓고 보면 참 잘생겼다.
이 그릇은 충청도나 전라도 어디 즈음, 어쩌면 무안 근처에서 태어났을지 모른다. 중산층이나 밥 굶고 살지 않는 아무개 선비네 밥상에 올라가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태어난 지 한 세기가량이 지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재까지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일종의 신분 상승이었다. 국그릇이 국보급 찻그릇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리나 과장이 갑작스레 초고속 승진으로 사장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게다가 외지인이라면 더욱이나. 이 극적인 드라마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차가 중국과 한국을 통해 들어온 지 어언 수백 년. 모모야마 시대 일본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당나라 시절부터 중국에 의존적이었던 차문화에 권력과 사치가 끼어들면서 더는 차문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차는 정치였고, 종교였고, 권력이었다. 그 와중 중국에서 수련하고 돌아와 자체적인 생산을 통해 점차 변화를 꾀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동시에 지식인 중에서도 당대의 사회문제를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함을 깨달은 이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닥쳤을 때 문제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려는 적극적인 태도에서부터 해결의 단계가 시작하고 또한 가장 어려운 일이라 말하지만, 그렇다고 마주 보는 일이 언제나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지는 않는 법이다. 그들은 나름의 노력과 방책을 찾아 헤맸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천황이 직접 나서 지식인들에게 방법을 구하는 일도 있었다.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1423∼1502)는 드넓은 서원차의 차실에 다다미 넉 장 반 크기로 병풍을 둘러치고 좁은 공간 안에서 천황에게 차를 대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주코를 비롯한 와비차인들의 움직임은 기존의 오래된 병폐를 개선할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선이 아닌 완전한 부정과 전복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파격이 필요했다.
그들은 기존의 차법을 버려야 할 병폐로 단정 지었다. 그리고 완전히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고향을 찾아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떼처럼 그들은 애초에 순수했던 자기 수행의 가치로서의 차를 찾아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더욱 소박하고 단순한 것, 자연스러움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렇게 발견한 가치를 개인의 생활 속에 녹이려는 시도가 와비차(侘び茶)의 핵심이었다.
기존의 유행을 거슬러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기물이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만큼 중국의 것들을 과감하게 배제했지만, 일본 스스로는 자신들의 사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수준의 그릇을 준비할 깜냥이 없었다. 당대 최고의 차인이었던 다케노 조오(武野紹鷗,1502~1555)의 명언이 그들의 절실함을 절묘하게 설명한다. ‘비범한 근심은 비범한 사물로서만 해결된다.’ 그 즈음 그들의 눈에 이 그릇이 들어온다.
이 그릇은 와비차를 통해 세상을 바꾸어보려던 차인들에게 와비차가 바라보는 세상의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이 덤벙 사발은 태생적으로도, 당대의 미적인 기준에서도, 쓰임새에서도 파격이었다. 단순한 부정에 의한 대안의 제시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종교’라 불리던 차문화에서 그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 자체를 뒤집어 버렸기 때문이다. 삐딱함, 기울어짐, 태토가 드러나는 손자국, 태토의 거칢, 유약의 모호함, 굽의 두터움, 높이와 넓이의 광활함,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잡으면 잡을수록 따듯해 보이는 혼란스러움이 당대의 파격이었던 셈이다.
치장 없이 형태만으로도 당당해 보이는 주인공은 섬세함이나 예리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손가락으로 툭 하고 잡아 유약에 덤벙 담갔다가 쑤욱 하고 빼내는 투박할 정도의 단순함. 야나기 무네요시는 1931년 <工藝>와 1955년 <柳宗悅全集 6권>에서 단순함의 아름다움과 비대칭에 관한 미의식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의견을 빌리자면 단순함이란 기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다. 최고인지 아닌지를 확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 관점에 크게 동의한다. 이 그릇은 전형적인 잡기였다. 개성 따위 누구도 자랑하지도 들어줄 일도 없던 그릇이었다. 사용하는 자는 대수롭지 않게 썼을 것이다. 자랑거리로 산 물건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었던 것, 누구나 살 수 있었던 것, 어디에서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이 찻그릇의 정체다. 그리고 동시에 천하일색의 찻그릇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검소한 것, 꾸미지 않는 것은 마땅히 인간의 경애를 받아도 좋다고 말이다. 전시되기 위한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쓰이기 위한 운명을 타고난 그릇은 얼마나 건전한가. 그렇기에 병약하지 않다. 건강함은 실용성을 담보로 갖춰진 선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찻그릇을 더러 ‘여기에 병이 걸릴 기회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 그릇에 기교의 병이 걸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되팔아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그릇이 아니다. 의식이나 감상의 병이 걸릴 일이 없다. 그토록 화려함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람들은 결국 이 그릇에서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나는 철학을 잘 모르지만 아름다움이란 결국 자연스러움에서 비롯한 것 아니었던가. 기물의 아름다움에 취해 기물을 자랑하고 모셔두는 것에서 그쳤던 것이 이전까지의 차였다면, 와비차는 평범한 기물에서 인생과 일상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발굴해냈다. 이보다 더 훌륭한 파격 미를 보여주는 예는 흔치 않을 것이다.
새로운 문화를 위한 새로운 기물을 찾던 와비지식인들이 조선 팔도의 인사들을 찾아 헤매다 김시습의 이야기를 들었다. 경주 남산 높지 않지만, 경치가 준수하고 험한 이 산속 깊은 곳에 숨은 듯 자리 잡은 용장사에서 그들은 드디어 김시습과 조우한다. 질그릇에 향을 피우고 쇠화로에 물을 끓여 마시는 찻자리 밖으로 남산 우거진 소나무 숲의 바람 소리와 용장 계곡을 따라 힘차게 내려가는 계곡의 물소리가 들린다. 허름한 초가지붕을 거처 삼아 사는 이에게서 듣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사롭지 않고, 인위적인 것이라고는 인간밖에 없는 이 작은 세계 안에서 차를 마시는 경험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파격 그 자체였다.
김시습이 차 마시는 그릇으로 내놓은 것은 국사발처럼 보이는 분청 혹은 발우처럼 보이는 사발이었을 것이다. 차를 마시는 공간은 으레 값비싼 황금과 보석, 귀한 목재와 기와로 지은 드넓고 화려한 곳이어야 했던 일본인들에게 초가삼간 방 한구석에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 하는 것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원도, 모래도, 분재도, 호수도 없으나 사방에 핀 야생화와 수 백 년 묵은 소나무 앞에 그들은 스스로 가둬 놓았던 틀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김시습은 당대의 기대를 등 뒤로 떨쳐내고 관습과 통념을 거부했던 사람이다. 본격적으로는 단종 폐위 이후부터 그는 속세를 등지고 팔도의 산속 머물며 자연에 귀의해 살았다. 그의 삶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세종이 직접 살펴 챙기던 신동에서 머리를 깎고 스스로 중임을 자처하는 그 인생 자체가 그러하다. 그였다면 차를 마실 때, 마치 절간의 스님들이 발우에 밥을 먹고 물도 따라 헹궈 마시듯 밥그릇이나 국그릇도 찻그릇으로 쓰지 못할 이유가 무엇 있냐 호탕하게 되물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김시습이 쓰던 찻그릇은 대부분 원을 반으로 자른 형태의 사발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이것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하고, 저것은 저것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예가 지나치면 헛된 예(虛禮)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는 단순하고 소박함을 사랑했다. 와비사상가들은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의 생각을 보듬어 안았다. 김시습이 살던 집, 그가 쓰던 물건, 그가 말한 한마디와 남긴 시와 이야기는 모두 일본인들이 몇 세기에 걸쳐 기록하고 연구하고 되뇌며 새겨둔 일종의 잠언이 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란 쥐꼬리만치도 없던 사람임에도 그는 존경받았다. 마치 오늘의 주인공이 그러한 아름다움을 지닌 까닭으로 사랑받은 것처럼.
아직 사화 이전이라 차문화가 뿌리째 뽑혀나가기 전이었지만 차문화가 곧 대중문화라 말하기에는 크게 모자랐던 사회에서 주인공과 김시습은 닮은 운명으로 태어났다. 김시습이 실제로 주인공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와비차라는 면에서 둘은 서로 닿아 있다. 1464년 세조실록 10년 2월 17일의 기록에 왜국의 사자 중 준초 등이 지난해에 하직하고 돌아갔다는 글귀가 남아 있다. 그리고 김시습이 쓴 글집 <매월당집> 12권 ‘유금오록’에 자신의 거처로 일본의 승려 준(俊)이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며 밤새 이야기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자신의 큰 벗이었던 서거정과의 편지에서 자신이 일본에 초청받아 융숭한 대접을 받고 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센리큐 대암차이나 와비차의 원형이 김시습의 초가집과 그의 초암차라는 주장에 대해 일본인들은 동의하지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주인공 덤벙 사발이 김시습의 초가삼간 방 한 편에 무심히 놓인 장면을 상상해 본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그릇에 담고, 새로운 결심은 새로운 공간에서 마련하는 것이 일본 이도와 대암의 요체**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오늘의 새로운 생각을 새로운 그릇에 담아내고자 하는 우리의 결심은 이루기 어렵더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 물론 공식 석상에서 우라센케 종장은 초암차가 자신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했다. ** 오늘의 주인공과 같은 덤벙 형식을 고히키라 부른다. 고히키는 이도와 함께 와비차의 핵심 기물로 손꼽힌다. 대암차실은 센노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불안 증세를 다스리기 위해 고안한 차실로서, 다다미 두 장 반 정도의 매우 좁은 공간이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리를 거의 절반 가까이 굽혀야 할 정도로 입구도 작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을 위한 마지막 고비를 앞두고 차 스승인 센노 리큐의 조언을 따라 이 차실 안에 들어가 꼬박 사흘을 지내고 밝은 얼굴로 나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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