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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16세기 백천목 다완, 청년 시로자에몬의 꿈


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04  


일본 중요문화재, 백천목 다완. 무로마치시대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도쿠가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천목 치고는 큰 키와 그에 비례하는 넓은 전. 몸흙과 분명하게 대비되는 밝은 빛깔의 유약 때문에 쉽사리 이 그릇을 천목의 후예라 부르기 어려워 보인다. 유유히 면을 감싸며 흐르는 푸른 빛깔을 집중하다 보면 청자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해볼 수는 있겠으나 그저 누가 보아도 이 그릇은 청자가 아니기에 그 생각도 잠시 접어둔다. 그렇다고 세상에 이런 백자가 어디 있겠는가. 분청이라 하기에는 시기상으로나 형식면으로나 적합하지 않다. 누군가 적어놓고 가르쳐 준다면 쉽게 외워 부르겠지만 이 그릇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쉽게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현 일본 중요문화재이며 무로마치시대 13세기에 만들어진 백천목이다. 낯선 이 작품은 도쿠가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16세기 초 일본의 대표적인 탐미주의자 다케노 조오가 사용한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다케노 조오를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들이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좋아한다. “다케노의 눈길이 스쳤다” 당시 차인들이나 미술애호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었는데 그의 눈길이 스친 물건은 반드시 명품으로서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시간의 간극을 넘어 무라타 주코의 차 정신을 잇고 혼란했던 당시 일본 차풍을 통일하여 새로운 경지로 개척한 센리큐의 스승인 이 인물이 사랑했던 그릇이라면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일본에 차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기 삼 사백 년 정도 이전부터였다.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교토 남쪽 우지에 심고, 백장청규를 변형한 영평청규를 만들어 승려를 가르치는 도구로 쓰였던 차는 곧바로 귀족과 사무라이들의 사치를 측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당시로서는 메이드 인 차이나, 즉 가라모노唐物가 곧 명품이었기에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차에 관련한 모든 것들을 수입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천목다완이다. 일본이 현재 보유한 천목다완은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천목 중 구할에 이른다는 말이 있다. 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납작한 차 도구를 수입하기 위해 일본 귀족들은 서민 가구의 일 년치 생활비를 거리낌 없이 지불했다. 허리춤에 찬 큰 칼과 빛나는 형형색색의 보석들, 그리고 천목다완이라는 기묘한 조합은 사람의 지위를 상징했다. 문화적으로 야만성이 빛나는 시대였다. 더 많은, 더 화려한, 더 값비싼 천목다완이 필요했다. 이에 일본이 시름시름 앓았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승려들을 해외로 유학 보냈다. 대표적인 예로 9세기 엔닌이 당나라 전역에서 유학하며 기록한 <입당구법순례기> 같은 경우가 있다. 그들은 때로는 스파이, 때로는 유학생, 때로는 외교관이나 무역중개인의 역할을 맡았다. 승려에 대한 불교국가의 관용이라는 타국의 배려를 발판삼아 수많은 지식을 배워와 자신의 땅에 다시 옮겨 심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남송 시대 저장성 항주지역으로 파견된 승려 도겐이었다. 도겐의 옆을 한 청년이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항주 천목산의 한 사찰에 들어가 천목다완을 연구했다. 그의 이름은 카토 시로자에몬 카게마사다.



생각해 보면 이는 보통의 열정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당시 일본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뱃길은 워낙 험해 직항 노선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 한반도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잔잔한 뱃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시대 장보고가 해상왕이라 불리었던 이유는 이 노선을 그가 홀로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그 반대의 경우 뿐 아니라 인도나 동남아, 아랍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류는 이 노선을 통해야만 가능했다. 따라서 여정의 길이는 생각보다 무척 길었다. 또한 중국 안에서의 차별이나 고생은 또 어떠했겠는가. 시로자에몬은 승려가 아니었던 까닭에 더 큰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막부차원에서의 명령이었든 개인의 호기심 때문이었든 아니면 둘 다였든 간에 이 패기 넘치는 젊은이는 그간 일본이 가지지 못했던 일종의 원천기술을 손에 얻었다. 수입 일변도였던 무역 지형도의 판세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귀국길은 그리 험난하지 않았던 듯하다. 문익점은 목화씨 하나를 들고 돌아오기 위해 수많은 조력자들의 정치적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목숨까지 건 모험을 강행했지만 승려들의 보호를 받았던 이 젊은이는 큰 고초를 겪지 않고 일본으로 무사귀환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고야 근처 아이치현 세토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작업실을 건설했다. 그리고 가마를 앉혔다. 그는 곧바로 송나라에서 배워 온 천목다완의 재현작업에 돌입했다.



완벽한 복제품 만들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손재주고, 하나는 재료공급이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 후자를 눈속임할 수 있는 다양한 화학공식이 있어 사업자들을 즐겁게 하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이 패기 넘치고 손재주 많은 청년은 도자기 뿐 아니라 탁자나 의자, 꽃병이나 항아리, 심지어 기와도 직접 구울 줄 알았다. 하지만 당체 중국산 흙은 자신의 고국땅에서 구현하기가 어려웠다. 형을 잡고 비슷한 모양새는 갖추었으되 색을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일본에서 만들어진 첫 중국 천목다완이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의 작은 작업실에서 시작된 천목다완 재현작업은 순조로웠고 주변으로 몇몇 도공들이 모여들어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촌이 만들어지고 세토야키라는 이름이 시작되었다. 허나 시로자에몬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이 시대는 천목의 시대가 아니었다. 송나라에서 그는 천목에서 청자와 백자로 바뀌는 미감의 시류를 보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전설처럼 내려오는 저 옛날 중국의 탐미주의자 육우가 아름다운 것끼리 어울리는 방법에 관해 남긴 이야기를 들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는 천목이 아니라 백자를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전에 밀린 숙제를 풀어야 했다. 자신은 아직도 자신만의 천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문제는 흙과 유약이었고 그의 연구는 다시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백자를 만들지 못한다는 속설이 깨지기 까지는 그로부터 사백여 년은 더 걸렸지만 시로자에몬은 드디어 일본 최초의 고유한 흙 조합과 유약을 발견했다. 중국처럼 새하얗지도, 한국처럼 은은하지도 않지만 투박함이 물씬 묻어나는 야생적인 맛이 도드라지는 갈색 빛깔의 천목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시로자에몬이 일본산 천목을 완성한 이후부터 그의 후손들과 세토야키의 도공들은 끊임없이 그의 도전정신을 이어받아 연구하고 실험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23대손으로 알려진 카토 츠나스케에 이르기까지 이 일족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일본을 표현하는 그릇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로자에몬이 고유의 갈색 천목다완을 만들어낸 이후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은 모두가 짐작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산 천목의 두 가지 갈래인 황천목과 백천목 두 가지를 모두 개발했다. 황천목은 기존의 노력의 결과물이니 두 말할 필요 없지만 이 백천목의 경우는 요상하기 그지없다. 이 글의 가장 첫머리에서 묘사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이 그릇은 완성도를 갖추었으되 당체 어디에 속한 녀석인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동시에 거대한 친밀감에 사로잡혔다. 우리 가족이 만드는 차도 이와 다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수색은 황차요, 발효도는 우롱과 홍차의 중간인데, 상미기간은 보이차와 같은 이 차를 처음 접하는 모든 차 전문가들은 서로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존의 분류방식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새로운 차니까 말이다.



이 백천목의 존재가 아리송한 당신에게 나는 이 그릇이 일본 특유의 집요함과 성취를 향한 열망이 빚어낸 아름다움의 결과물이라 소개하고 싶다. 출발선이 늦어도 한참 늦었던 일본이 중국과 한국을 따라잡기 위해 공들인 천 년의 기록의 역사와 그 무수히 많은 과정 한 가운데서 나보다 앞선 것에 쉽게 빠지곤 하는 우를 범하지 않은 이들이 만들어낸 쾌거다.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남의 것을 빌어 시작하지만 대부분 모방에서 그치고 마는 가운데 시로자에몬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었고, 일본만의 것을 자신이 세상에 내 놓았다는 자부심을 얻고자 했다.



저 백천목 안에는 약 이백여 년에 걸친 시로자에몬과 그의 후손들의 생과 사가 녹아 있다. 단순히 숨을 쉬고 먹고 자는 삶의 차원을 넘어 순수하게 자신들이 성취해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을 향해 대를 이어 도전하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는 고난의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렇기에 도대체가 미워할 수 없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먹먹하게, 숙연하게 그리고 부끄럽게 하는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백자를 완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아쉬움이 너무나도 진하게 녹아 있어서였을까. 섬나라의 탐미주의자는 백 년 전 죽은 도공의 아쉬움을 당당함으로 바꾸어 줄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무라타 주코가 창안한 소박한 마음의 차 안에는 그 무엇도 뚫지 못하는 당당함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라 믿었다. 결점 없이 새하얀 백자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당당함이 이 그릇에 녹아 있음을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그는 과감히 비싸고 화려한 천목을 던져버리고 이 백천목을 손에 쥐었다. 가난한 하층민의 인생에서 성공한 상인으로, 돈 많은 졸부에서 예술을 탐닉하고 행동하는 예능인으로, 몸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예능인에서 정신으로 아름다움을 받아들여 갈무리하는 차인으로 끝없는 변신을 해 온 다케노였기에 가능한 파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더 잘 할 수 지점을 찾아, 자신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위치를 찾는 여정은 곧 자기 안에 두드러진 아름다움의 보석을 찾아 떠나는 여행과 같아서 이를 위해 평생을 걸어온 다케노의 눈에 백천목으로 표현된 시로자에몬의 세계는 이채롭고 닮아 있다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것,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경지를 참된 아름다움의 세상이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천재적으로 번뜩이는 한 순간의 아이디어나 한 순간의 시도로 가능한 곳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노력의 시간들이 두터운 유약처럼 겹겹이 쌓여야 하니까.






다케노 조오(武野紹鷗,1502~55) 흉상. 오사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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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member
Mar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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