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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故 김대희, 청자연꽃보듬이: 어제로부터 태어나 내일을 위한 힘이 될, 오늘의 그릇


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02








  

보듬이는 세상에 없던 그릇이다. 옛 디자인을 본떠 만든 것도 아니거니와 누군가의 철학도 베껴온 것이 아니니 그 자체로 현대적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고유의 철학을 바탕삼아 만든 그릇이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보듬이는 의미가 크다. 故 김대희 작가의 청자연꽃보듬이는 그 어느 작가들의 것보다 가장 먼저 세상에 나왔고, 독창적이다. 보듬이가 지녀야 할 요소를 어느 하나 빠지거나 모자람 없이 모두 채웠다. 



세상의 모든 창조가 그렇듯 보듬이도 그 원형이 있다. 신석기시대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에서 비롯한 이 디자인은 언뜻 보기에 밥그릇 같기도 하고, 사발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밥그릇으로 쓰기에는 조금 크고, 사발로 쓰기에는 끝이 적당히 오므라져 적합하지 않다. 청자연꽃보듬이는 세상 그 어떤 찻그릇 심지어 모든 종류의 도자기들과도 닮지 않았다. 이 작품의 형태는 원형에서 시작하여 작가의 재해석으로 끝난다. 작가 고유의 선이 없다면 원형의 모방에 그쳐 좋은 보듬이는 태어나기 어렵다.


故 김대희 작가는 하고많은 색 중에서 청자를 골랐다. 청자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자 동시에 아픔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비롯하였지만, 고려가 그들에게 없는 보다 고고하고 수려한 색과 형태의 청자를 만들어내면서 한반도 도자기 역사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하지만 동시에 청자는 귀하고 값비싸 서민들은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의 색채를 대변한다 하여 조선 시대에는 철저히 배척당했다. 오직 그 주변적인 기교가 남아 분청에 흐르기는 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청자는 도리어 매우 낯설다. 좋은 청자는 이미 일본에 다 가 있으니 박물관을 가도 볼 일이 별로 없다. 작가는 굳이 이런 청자를 골랐다. 청자의 기술은 결국 색이고, 색은 언제나 바탕이 되는 면적의 넓이와 형태의 영향을 받는다. 작가는 아마도 이 크기와 모양의 그릇에 어울리는 청자색을 고민했을 것이다. 가만히 보면 이 그릇은 단색으로 꾸며져 있지 않다. 청색이되 청색만은 아니다. 우리는 으레 푸를 청靑자를 써서 청자라 부르지만 ‘청’이란 중의적이다. 이 보듬이는 그 모두를 가지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게 짙고 연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품이 느껴진다.


화룡점정은 작가의 유희적인 측면이다. 과함은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하지만 작가에게 이러한 표현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청자의 고고한 매력에 양각으로 새겨진 연꽃문양,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형태 위에 수없이 많은 세로 선이 촘촘히 들어섰다. 연꽃은 이전까지 무늬로 그려 넣는 장식이었지만 여기서는 양각으로 새겨 그 자체로 그릇이 되었다. 그 누가 양각이 새겨진 청자 위에 같은 청색으로 줄무늬를 넣을 생각을 했겠는가. 그건 고금을 통틀어 그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원칙주의자로서 일궈낸 고전미와 동시에 그것에 그쳐 단순히 모방 차원에 머무를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빚어낸 현대성이 공존한다.






보듬이에는 굽이 없다. 이것이 이전의 모든 찻그릇과 보듬이가 구분되는 점이다. 굽은 그릇의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진흙으로 그릇을 구울 때 처음부터 굽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굽은 어딘가에 기대거나 잡지 않아도 그릇이 그 자체로 안정감 있게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장치였다. 찻그릇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천목이든, 청자든, 백자든, 분청이든 그 어느 시대건 굽은 항상 숨 쉬는 것처럼 함께 했다. 하지만 동시에 굽은 매끈한 곡선이 사방에서 서로 만나는 지점에 느닷없이 등장해 미적인 감상을 방해하는 녀석이기도 하다. 완만한 경사가 짧은 크기의 찻그릇에서 굽의 수직성은 여러모로 반갑지 않다.


굽이 높으면 높을수록 왠지 그릇은 추해지고 현실성이 사라진다. 제사용 제기 그릇들의 굽이 높은 까닭은 우리가 발붙이며 사는 땅과 멀어질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반면, 찻그릇은 오늘을 기점으로 내일도 모레도 차를 마셔야 하는 현실을 보듬기 위한 숙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형태 면에서나 의미 면에서나 미적으로 굽은 낮을수록 좋다. 없으면 더 좋다. 청자연꽃보듬이는 굽 없는 찻그릇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한다. 굽 없이도 그릇의 지름과 높이의 비율만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쥐는 이로 하여금 당당함을 느끼게 한다.

청자연꽃보듬이는 보듬이가 갖춰야 할 조건을 높은 수준에서 모두 만족시키며 후대의 보듬이 작가들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동시에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보듬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그릇을 대표하는 책임감도 부여받았다. 그릇은 알게 모르게 나름의 방식으로 각 시대를 설명해 왔다. 어느 시기에는 채색 그릇이, 어떤 때는 청자가, 또 어느 시절에는 백자나 분청이 유행했다. 천목이 세상 전부인 것 같았던 때도 있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그래왔고, 미래에도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현재와 현재를 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없다면, 이를 두드리는 도전과 실험이 없다면 우리 미래의 주인공은 아마도 일본이나 중국의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보듬이를 현재의 우리를 설명하는 오늘의 그릇이라 말하고 싶다. 이 보듬이를 어제로부터 태어나 내일을 위한 힘이 될 오늘의 그릇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보듬이를 대표하는 청자연꽃보듬이에서 시작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려 한다. 오늘이 있기 위하여 어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전은 무엇으로 비롯하였는지를 하나하나 되짚어가다 보면 왜 오늘이 의미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 길을 정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동안 적어도 우리의 미래를 다른 이에 기대야 한다는 끔찍한 상상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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