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06
높이 7.2센티, 입지름 17.5센티, 굽지름 5.7센티의 평범해 보이는 크기와 모양의 찻그릇. 완만하게 감싸 올라가 둥글게 돌다 끝이 나는 넓적한 면은 동시에 묘한 직선의 느낌으로 날카로운 기세가 있다. 굽에서 전으로 올라가는 곡선은 활처럼 휘지만 절반을 넘어가서는 그 경사도를 높여 지루함을 벗었다. 굽은 유약이 입히지 않았는데 이는 유약을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흐르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막은 까닭이다. 하늘색 유약의 층이 얇고 가는데 위는 옅고 아래는 풍부하다 못해 아예 고드름처럼 두 갈래로 흘러가다 아래로 뭉쳐 굳었다. 갈색의 태토가 굽 전체와 그 주변부로 불규칙하게 드러나 있고 그릇의 전 부위 역시 마치 유약이 묻지 않은 것처럼 얇게 발라져 갈색의 태토가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옛 어른들은 귓불이 넓고 긴 사람을 더러 인품이 있고 덕이 깊어 크게 쓰일 상이라 했다. 마치 달마조사의 귓불처럼 아래로 늘어진 두 가닥의 유약덩어리가 인상적인 주인공을 찻자리에서 마주하면 자연스레 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색은 풍미가 있어 두 가지 색이 자연스레 두 번을 교차하며 서로의 매력을 뽐내는데 마치 새벽에 뜨는 노을 같이 고요하고도 또렷해서 아침에 어울린다. 이 그릇이 찻자리에 놓인다면 그 옆에는 잔재주라면 가히 손꼽히는 재주를 부린 녀석이어야 할 것이고 백자라면 흔한 무늬나 글씨 하나 티끌 하나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찻자리는 차만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함께 우러나는 자리다. 이를 잊지 않고 자리수건을 펴는 이들에게 주인공은 풍성한 거리를 선물할 것이다.
이 찻그릇의 이름은 균요천람완鈞窯天藍碗.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있다. 원나라 때 만들었다. 정확히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정확한 이름이라기보다는 중국 하남성의 균요에서 만들어진 완들 중 천람색 유약을 입고 나온 그릇들을 가리킨다. 균요는 송나라시대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다. 송오대요宋五大窯 중 하나로 명성이 자자했다. 북송을 대표하는 도자기 산지였고 철과 동을 사용해 색을 내는 것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당대에는 가장 값어치가 높은 그릇을 구워내는 곳이었는데 “황금에는 가격이 있지만, 균요자기에는 가격이 없다” 라던가 “집안재산이 만관이 있어도 균요 한 점 만은 못하다”는 말이 돌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균요의 도자기는 산화동을 이용해 유래 없이 아름다운 색채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천람天藍은 균요가 자신있게 뽑아내는 푸른빛깔 삼총사 중 하나였다. 기본 유색은 남색 유광유였는데 엷은 남색은 천청이라 하고 짙은 남색이라면 천람, 천청보다 더 엷은 색은 월백이라고 불렀다. 푸른빛깔 중에서도 짙은 편에 속하는 천람이지만 완연히 파랗다기 보다는 하늘색에 가깝다. 이는 균요에 영향을 준 친구들 덕분이었다. 요주요耀州窯는 올리브그린의 유색을 특색으로 하는 청자를 만들었다. 여요汝窯에서는 북송시대 말 궁정용의 우아한 청자가 생산되었다. 균요는 이 두 명요名窯에서 영향을 받았다. 두 가마의 영향으로 균요의 빛깔에는 오묘함이 녹아 있다. 하지만 슬프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점은 균요가 원대를 넘기지 못하고 폐요廢窯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원나라 시대는 오로지 청자와 백자의 시대였다. 원의 말엽에 이르러 청화의 개발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이 역시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에 불과했을 뿐 당대 시장의 흐름을 보면 청자와 백자 일변도의 시대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국에는 꾸준히 복고풍에 관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관심이 폭발했던 때는 바야흐로 원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송나라 시대에도 황제나 최고층의 권위로 여겨졌던 삼대 청동기는 크게 인기가 있어 민간에서도 그 형상을 본떠 구워 사용했다. 유행은 몽고가 중국에 원 정부를 세우고 항저우에 광제고廣濟庫를 세우면서 본격화 되었다. 송 황실에서 몰수한 재산을 이 곳을 통해 관리하며 거래를 통해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전 왕조의 미술품을 전유하고 보존하는 것으로 왕권교체를 정당화하는 정치행위로 삼았다. 이것이 송대의 미술품을 거래하는 고기물 시장의 활성화를 자극했다. 원나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송대의 백자나 청자를 소유하는 것을 하나의 사회적 활동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퍼졌고 전란을 피해 잠들어 있던 고기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원나라 귀족들이나 상류층이 송대의 청자와 백자를 선호했다면 오늘의 주인공과 같은 색채자기는 해외로 수출되는 중국의 최신 수출품이었던 걸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그러한 사회 분위기에 중앙아시아와 일본이 뛰어들었다. 일본은 14세기가 넘어가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힘이 강성해지는 만큼 사치와 부패도 심해졌다. 그들은 중국의 고기물을 선호했다. 1363년 법청法淸이라는 승려가 작성하고 원각사圓覺寺 불일암佛日庵에 소장된 <佛日庵公物目錄>에 기록된 송대 도자기에 관한 기록을 볼 때 당시 항저우를 자주 왕래하던 일본인들도 중국의 복고풍이나 고기물에 대한 흐름을 분명히 체감하였으며 일본 상류층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들었다. 원대 미술품을 대하는 일본의 선택적인 수용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름모를 그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일까.
원대에 이르러 잘 나갔던 유명한 도자기 요들은 앞다투어 송대의 백자와 청자를 재현하고 모방했다. 신안선에 실려 일본으로 향하다 좌초되었던 보물선에서 건져낸 중국 도자기의 대부분은 청자와 백자였다. 거기에는 용천요 청자, 경덕진요의 백자가 전체의 77%다. 소수의 수량을 제공한 요들도 있었지만 철점, 의홍, 공주, 석만, 길주, 정요에 심지어 고려청자도 있었지만 그토록 화려했던 명성의 균요 작품은 단 한 점도 포함되지 못했다. 전체 2만여 점에 가까웠던 수량이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의심은 확실해진다. 균요는 이미 원대의 미술품 시장에서 그 빛이 바랜 것이다.
옛 균요의 작품들에 비해보면 주인공은 높이와 넓이 비율 모두에서 벗어나 있다. 높이에 비해 굽은 더 낮아야 할 것 같고, 넓이에 비해 굽이 좁은 듯해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유약이 전에서 더 흘러내려오지 못하게 붙잡아 입지름 둘레에 걸쳐 태토의 갈색 마치 실선 하나가 지나가듯 드러났어야 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마치 톤을 층내서 나누듯이 갈색과 푸른색 모두를 마치 그라데이션으로 연출하듯 묘하게 경계지었다. 혹부리 영감 같은 저 유약 덩어리는 또 어떠한가. 20세기에 와서 일본 비평가들이 마치 눈물과 같다 하여 이름붙이기도 했던 그 방식을 넘어 아예 혹처럼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저 형식은 마치 당시 도자계를 지배하던 정형화에 대한 일종의 도발 같기도 하다. 이름도 모르고 경력도 알 수 없는 이 그릇의 작가는 어쩌면 괴짜 중의 괴짜였을 수도 있다. 역사의 무게가 무겁고, 유행하는 것에는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골몰했던 한 도공. 주인공을 빚은 도공은 어쩌면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지. 비록 상상으로 만들어 본 인물이지만, 어쩐지 나는 그 도공이 벗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솔직히 그래서 나는 저 그릇이 좋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예술은 비범한 기술의 완성도를 뽐내는 결과물이었다. 손톱만한 돌에 산수화를 새겨 넣는다거나 그릇 외벽에 화려한 무늬를 부조로 새기거나 아예 집채만한 바위에 부처를 각인한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그런 전통에서 균요의 찻그릇은 아름다운 색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볼 수 있다. 전형적인 외형에 독보적인 색감을 구축했다. 그러나 주인공이 등장한 원대의 균요는 거기에서 어쩌면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비율의 거부, 깔끔함을 벗어난 성형과 굽 처리, 선명한 발색과의 결별은 결과적으로 투박하다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투박하지만 완성이 덜 되었다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추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면 반대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