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10
누가 보아도 라쿠(樂) 같아 보이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보아도 라쿠다.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어느 쪽으로 돌려 보아도 일그러져 있다. 선이 굽이치는 물결 같다. 그릇의 전과 면 어디에서든 일렁이듯 춤춘다. 쪽빛이 살짝 스쳐 가는 몸통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검정의 유약은 마치 암막을 드리우는 커튼 같기도 하고 별들마저 모두 잠든 야심한 밤의 은하수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활화산 같은 역동성 가운데에서 묘하게 쵸지(가문의 초대, 初代 長次郞의 준말)의 검정라쿠(黑樂)를 떠오르게 한다. 이 그릇은 라쿠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높이, 넓이, 지름, 굽과 몸의 비율, 유약, 형식까지 모두 전통의 라쿠다. 하지만 400년의 라쿠 역사에 이러한 역동성은 없었다. 생소하다. 이것은 전통의 라쿠인가. 아니면 현대적인 세련미를 내세운 새로운 라쿠인가.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전통과 세련미를 동시에 지닌 그릇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그릇이 하필이면 라쿠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 그릇은 2000년에 탄생했다. 작가는 15대 키치자에몬(十五代吉左衞門 지킨유Jikinyū·直入)다. 49년에 태어났으니 거의 반세기를 살고 주인공을 잉태한 셈이다. 담담하고 솔직하며 도발적인 이 그릇은 어느 날 한순간에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두 특징을 한 몸에 담을 수 있었던 까닭은 작가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젊었을 적 지킨유는 전통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반항아였다. 400년, 14대를 거친 가문의 전통이 그에게는 특별하지 않았다. 예술을 좋아하고 표현하기를 좋아했지만 다도(茶道)나 도예에 관심이 없어 도쿄예술대학 조각과에 입학했다. 그는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작가가 되기 위해 졸업 후 이탈리아 로마 조각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큰 도전이었다. 처음으로 서양으로 유학을 떠난 가문의 이단아였기 때문이다. 라쿠가(樂家)는 그저 그런 가문이 아니다. 라쿠는 일본 차문화 뿐 아니라 정신문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다. 온건히 자신의 것을 지키고 계승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그는 우려할 만한 존재였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일본 정신이 외부의 것과 섞여 혼탁해지거나 희석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에게 외부의 우려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안에 있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왔지만, 그곳에 그를 위한 답은 없었다. 벽만 마주할 뿐이었다. 멋진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 많은 일본인 청년은 아찔할 정도로 화려하고 숙연해질 정도로 매끈한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의 작품들을 보며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보로미니의 레파토리를 생각할 때면 자신이 여기에 왜 왔고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가끔 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라쿠가문의 자손이고, 검고 붉은 흙을 다루는 신비로운 핏줄의 후예이며, 일본 차문화와 정신의 명맥을 잇는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 지킨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로마에서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다도와 도예에 처음 눈뜨게 된 일은 중요하지만,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눈앞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모든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은한 푸른 쪽빛의 몸통 위로 흘러내리는 저 검은빛은 꿈 많던 작가 지망생의 눈앞에 펼쳐졌던 절망과 암흑의 이야기였을까. 타르처럼 찐득하고 용암이 흐르다 굳은 것처럼 검은 이 멋진 질감과 색은 그저 방황하던 아이와 21세기를 맞이한 멋진 작가 둘 사이 25년 시간의 궤적을 보여준다. 지킨유(直入)는 키치자에몬(吉左衞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와 쵸지 사이의 모든 시간의 흔적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르는 장인이 되는 선택지를 버렸다. 동시에 미켈란젤로와 보로미니를 흉내 내는 일본인이 되는 목표도 버렸다.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무엇이 되어도 관계없다고 믿었다. 주인공 검정라쿠완가을국화(黒樂茶碗秋菊)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그 결과고, 증거다.
센리큐(千利休)는 쵸지에게 라쿠를 디자인하고 설명하는 데 언제나 직선적인 태도를 고수했다고 한다. 직선적인 미감이란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억지로 완충재를 넣으려고 시도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리큐의 세계 안에서 완충재란 어설픔이나 모자람을 감추는 위장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거친 흙벽을 사용할 경우에는 그대로 두기를 원하지 결코 거기에 표면 장식을 추가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쵸지의 검정라쿠는 여전히 아름답다. 시대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을 만큼 세련되었다. 키치자에몬은 이 점을 잊지 않았다. 이 그릇의 이름이 ‘가을국화(秋菊)’라 해서 만약 국화 한 송이를 그려 넣었다면 얼마나 비참해졌겠는가. 흘러내리는 유약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은 장막을 연상한다고 해서 반짝이는 가루를 뿌려 넣었으면 얼마나 천박해졌겠는가. 키치자에몬이 주인공에게 불어넣은 것은 전통을 대하는 솔직한 태도였다. 리큐의 미의식을 온전하게 받아들여 흙과 면과 색만으로 아름다웠던 쵸지의 라쿠를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라쿠로 표현했다.
손 빚음手捏(てづくね) 또한 센리큐와 쵸지 사이에서 비롯한 결과물이다. 리큐는 유행했던 양산방식인 물레를 거부했다. 당시 그릇의 효용 가치를 따져볼 때 이는 미련한 짓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라쿠에 한해 물레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대대로 전해지는 라쿠의 또 다른 전통이다. 이 원초적인 성형방식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끼는 촉각에 오랜 시간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고, 동시에 이를 시각으로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숙달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지루함이나 조급함을 이길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하다. 라쿠가문은 이 태도를 존중하고 지켜왔다. 따라서 물레를 사용하면 라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물레가 가진 수많은 장점, 물레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음에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손 빚음은 무한에 가까운 파형(波形)의 영역이기도 하다. 심심함에서 파격에 이르는 수만 갈래 선(線)들이 모여 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지는 온전한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기에 전통에 기대고만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손 빚음에서 작가의 역량은 한껏 도드라진다. 역동적이지만 안정감이 느껴지는 작업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의 높낮이가 들쑥날쑥 해 차이가 커도 불안하다는 느낌이 없다. 그보다는 마치 재미난 롤러코스터를 타고 한 바퀴 멋진 공원을 활보하고 온 기분을 느낀다. 면이 얼마만큼 도드라지거나 조신해질 수 있는지는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주인공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이 가 닿는 저 검은 유약은 어떤가. 라쿠가에서 검정과 빨강은 가장 귀하고 조심스러운 색이다. 이 또한 쵸지로부터 비롯한 것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런데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이 색에 대한 고집 안에 비범함이 숨어 있다. 미의식과 손 빚음의 경우에서 그러했듯 유약의 경우에서도 키치자에몬은 주인공 안에 아이러니의 아름다움을 심어두었다. 가문은 유약에 있어 계승자의 창의력 발휘를 강조했다. 같은 검정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가 있을 수 있음을 일찍이 본 것이다. 현재에 이르는 라쿠의 검정은 계승자들 각각의 개성이 거듭 누적되어 쌓인 창의적인 결과물이다. 따라서 유약의 변조에서는 절대로 후대에 계승하지 않는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전승되는 것은 뿌리에 대한 자부심과 창의성에 대한 존경 그 자체지 손재주 혹은 기술이나 비법 같은 것이 아니다. 계승자는 반드시 처음부터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자신의 검정 유약을 찾아야 한다.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계승자를 떠나 한 명의 작가로서 생명력이 중요했음을 가문은 일찍이 알고 가르쳤던 셈이다. 유구한 전통이며 동시에 계승에 안도하지 않는 전통이다.
이 ‘가을국화(黒樂茶碗秋菊)’를 완성하며 키치자에몬은 젊었을 적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고민을 털어낼 수 있었을까. 이제는 다음 대에 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난 작가에게 묻고 싶다. 주인공의 자태를 보라. 그리고 여기에 차를 담아 마시는 상상을 해보라. 이 검은 그릇 안에는 당신이 갖고 있던 예쁨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반듯한 모양이나 색깔도 없다. 당신이 옛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옛것답지 않아서 모자랄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새것답지 않아서 부족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바라만 보기에도 아름답고, 어디에 세워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옛것답지 않아서 새롭고, 새것 같지 않아도 세련되었다.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 더욱 마음에 든다. 450년의 전통의 굴레 안에 스스로 머물기를 자처한 사람이다. 하지만 안도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굴레의 벽으로 보호 받기 위해 머무는 까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자라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모두 온전히 내가 보고 내가 생각하며 내가 느끼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는 치열한 고민이 느껴진다. 멋진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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