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다 보듬이 05 : 시간의 그늘 보듬이.
나무 아래 잠이 들었다. 잠결에 기척이 나 눈을 뜨니, 나무 그림자 어름에 상앗빛 옷을 단정히 입고 서 있었다. 누구더라. 실바람에 그림자는 살랑이고 그는 아스라이 빛 속으로 물러섰다. 어두운 듯 환한 듯 가물거린다. 봐봐. 속삭이는 소리에 잠을 깨고, 한철이 지난다. 계절은 길었다 짧아지는 시간의 그늘처럼 다가왔다 물러선다.
빛 아래 반짝이는 것은 지난날. 벌써 십여 년 가까이 되었다. 겉은 둥글지만 완전히 동그랗지는 않고, 쓰다듬으면 보드랍지만 매끈하지는 않다. 어찌 보면 오래되고 잘 손질된 나무 조각 같고, 어찌 보면 정으로 얇게 쪼고 다듬은 석재 같기도 하다. 어떤 이는 온기를 품은 커다란 알을 떠올리고 또 어떤 이는 고대의 화석을 상상한다. 손 ‘수(手)’에 하늘 ‘천(天)’를 더해 이름 붙여진 수천 보듬이다.
얼었던 강은 녹아 흐르기 시작하고 언 땅에도 볕이 스미던 어느 해 우수 무렵, 봄을 몰고 오는 천둥번개를 품은 보듬이를 만난 지도 다섯 해째다. 거센 바람에 휘몰아치듯 바뀌는 먹구름 낀 하늘이 되고, 밭갈이하는 쟁기에 힘차게 패이고 뒤집히는 흙살이 된다. 까끌까끌하니 손바닥에 쥐는 감촉은 봄 가랑비 빗살 같고, 들여다보면 흙빛 속에 설핏한 빛이 어린다.
여름과 가을의 어름에서 겨울을 일깨우고 봄을 떠올린다. 두 손 가득 쥐고서 멈춘 적 없는 시간을 들여다본다. 지나간 시간의 그늘은 깊고 청량하다. 잠들었던 옛 기억은 깨어나 흘러들고 기억은 시무룩이 웅크린 마음에 숨을 불어 넣어 아주 천천히 그늘 너머로 걸음을 내디딘다.
- 2021년 8월, 처서 날
보듬이에 담긴 철학을 음미하게 이끄는 작가의 처음과 지금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지나온 십 년의 역사, 그 시간의 그늘 아래서 태어나고 또 다른 빛을 드리울 다가올 계절이 기다려진다.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큰 이미지로 보듬이를 감상하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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