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동장윤다 차살림법
집안을 가득 채우는 이 공기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 걸까. 우주에 새로이 태어난 소악마는 걷는 걸음마다 불안과 생기라는 역설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몇 가닥의 탄성이 쉴 새 없이 흩날리고, 바닥에는 눈물 몇 방울도 얼룩져 있다. 나는 이 혼란의 공간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걸까. 배울 것 없는 순간은 없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나 모두에게서 배우고 모든 것에서 배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을 배울, 그런 복이 내겐 없나 보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뺨을 때리고 나부끼는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불길과 차가운 바람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세 살 아이의 동선과 의도는 파악하기 힘들다. 이것은 첫 경험에서 비롯한 무지의 결과인가 아니면 지식과 경험을 무력화시키는 아이들만의 능력이 따로 있는 것인가. 먼지는 청소기로 빨아들이면 되고, 매캐한 냄새는 환기로 해결하면 된다. 똥과 오줌은 닦으면 되고, 어질러진 잡동사니들은 정리하면 된다. 흘린 것은 주우면 되고, 날아간 것은 몇 걸음 더 걸어서 주우면 된다. 남자의 육체라는 압도적인 우월함을 앞세우고도 나는 여전히 어지럽다. 소도에는 북과 방울을 경계에 달아 제사 기간에 그 안으로 들어온 이는 벌을 받지 않았다는데 그런 곳은 어디 없을까. 아니 애당초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죄는 아니니 그런 곳은 어울리지 않겠지.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군사들이 자신을 사로잡았을 때 호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의 금과 그 두 배의 은을 약속했다. 방안에서 번쩍이는 그 많은 보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피사로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그만큼의 금은보화라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금은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물건이지만 이 아이는 금붙이 따위로는 살 수도 없고, 얼만큼의 값을 치른다고 순순히 항복할 위인도 아니니 별 쓸모없겠다. 하다못해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히스클리프라도 좋으니 이럴 때는 그저 한잔할 수 있다면 좋겠다.
라 만차의 저 늙은이는 동굴을 탐험하고 나와 시답지도 않은 모험을 계속하다 결국 제정신이 돌아와 죽었다. 반대로 파우스트는 비바람이 부는 언덕을 피해 동굴에 안착한다. 비바람이 숲을 요란스레 헤집고 주위의 나뭇가지들을 휩쓸면서 커다란 나무들이 쓰러지고 그 땅 울림이 언덕에서 퍼져 허허로이 천둥처럼 들릴 때, 그는 동굴 안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새로이 만난다. “이 가슴 속에 깃든 신비와 경이가 드러나는구나.” 폭풍이 몰아치는 바깥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고작 몇 발자국 깊이의 동굴 속에서 그는 온화하게 떠오르는 달을 보고, 암벽과 덤불에 젖은 이슬과 물방울의 세계를 발견한다. 지친 내게 필요한 건 저 동굴이다. 폭풍을 온화함으로 느끼고, 비바람을 젖은 이슬처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평온의 세상이다. 단테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발견한 동굴을 타고 이승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 동굴의 경험으로 그는 반쪽 같았던 자신의 삶이 온전히 충만해짐을 느꼈다. 그런 진귀하고 세상 신기한 벅찬 경험 같은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여기, 이 자리에 펴 놓은, 펼친 두 손 가득 채울 크기의 하얀 자릿수건 하나의 세상이 더 요긴하다.
잠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나는 차 끓일 물을 불에 올리고 한숨 고르며 생각한다. 훌쩍 떠나 스스로 다독여 보는 것도 좋지만, 그건 내가 삶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다. 순간의 깨달음으로 정신을 고양하고 마음을 드높이는 경험이 미진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게 갑작스레 찾아올 것이란 기대도 않는다. 다만, 멀리 가지 않아도, 그저 한 발자국 옆에 내가 꾸릴 수 있는 꽤 괜찮은 풍경이 있다. 한 장 차수건 위 세상 안에는 흙에서 태어났다는 인간이 빚은 도자기의 풍경이 있다. 보드랍고 빳빳한 하얀 면포,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과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온유한 바람의 결이 우리 가족을 차분하게 한다. 한 손에는 인형을, 다른 한 손에는 칫솔을 들고 서 있던 저 아이의 두 손이 온전히 보듬이를 감싸 쥐고 있는 이 마법 같은 순간을 당신은 아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폭풍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눈감고 앉아 잠시 쉴 내 터를 찾았을 뿐이다. 그렇게 하루에 두어 번 찾아오는 이 내면으로의 동굴 여행이 눈 따위 오지 않을 따뜻한 소설 날에 당신에게 들려줄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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