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17장
차살림 준비
_꽃
삼한시대 우리나라는 여러 부족 국가의 연맹 형태였다. 작은 중소 도시들이 각자의 유리한 점을 살려 마치 군웅할거와 같은 모양새를 이루었다. 이러한 군소 세력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전제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거대 3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그들은 나름의 독자적인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삼국시대가 정치와 종교의 권력이 한 명의 독점 형태로 합쳐진 모양새였다면 삼한시대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의 분립은 지배의 분리, 곧 땅의 분리로 이어졌다. 읍(邑)이 곧 지역의 중심지 혹은 나라의 중심지를 의미했다면 이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왕 혹은 부족장이었다. 하지만 종교가 분리되었던 만큼 종교 지도자를 위한 별도의 읍이 존재했고, 그것이 별읍(別邑)이다.
별읍은 기본적으로 왕의 입김이 크게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존재했는데, 그것이 소도(蘇塗)다. 소도는 하늘의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공간이고 그 공간을 관리하는 것이 제사장 즉 종교 지도자였다. 소도를 상징하는 것은 큰 나무 한 그루였고, 그 둘레를 빙 둘러쳐 신성한 구역으로 삼았다.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던 ‘불가침 영역’의 공간이다. 짚으로 꼰 왼새끼줄을 금(禁)줄로 둘러쳤고, 왕의 영역에서 죄를 지은 자가 그곳으로 도망치더라도 잡아 벌할 수 없었다. 마치 성당 안으로 도망친 죄인은 인간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으로 심판해야 한다는 가톨릭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곳은 피난처(asylum)였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에는 어사일럼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만약 피치 못할 이유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인간은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해 일단 이곳으로 도망쳤다. 초월적인 신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이 제단으로서의 어사일럼은 범죄자를 체포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무조건적인 복수로 물드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들어온 죄인은 정당한 심판을 받아야 했고, 아무리 우발적이었다 하더라도 살인은 죄였기에 도시 바깥으로 추방하여 이스라엘의 동쪽 요단강 너머의 여섯 도시(골란, 람모스, 보소르, 게데스, 세겜, 헤브론) 중 하나로 망명할 수 있었다. 물론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망명 입국을 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보호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소도의 큰 나무는 인간 세계의 신성함을 상징했다. 비록 금줄의 바깥일지라도 신목(神木)의 죽은 가지가 바닥에 떨어져도 이를 가져다 땔감으로 쓰지 않았다. 낙엽이 져도 이를 가져다 불쏘시개로 쓰지 못했다. 사람들은 신목이 주는 경외감을 적극적으로 믿고, 이용했다.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의 상징은 세계 곳곳에서 등장한다. 북유럽의 세계수 위그드라실(Yggdrasil)은 거대한 물푸레나무 한 그루를 상징했다. 뿌리에서부터 잎에 이르는 삼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나무 안에서 천상과 거인, 지하 세계가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켈트족들의 부족장은 드루이드(druid)라 불렀다. 그들은 참나무의 지혜를 설파하는 이들이었는데, 드루(dru)란 참나무, 이드(id)는 지식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거대한 참나무를 하나의 신성의 상징으로 삼아 신이 인간에게 뜻을 전달하고 가르침을 내려주는 도구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느티나무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느티나무 그늘을 의지하며 살았다. 보호수이자 신령수였다.
초기 신앙 체계의 자산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여전히 오늘의 우리에게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힌트를 제공하고, 인생의 멋진 면에 관한 은유를 제공한다는 사실이지 않은가. 차수건을 넓게 펴고 오늘의 내 삶의 이야기를 펼친다. 그 안에 올라갈 각양각색의 차도구들이 각자의 역할로 내 삶을 장식한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 불쾌했던 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욕심 내지 말고 수수한 꽃 한 송이,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한 가지를 주워다 내 작은 세상의 소도를 세워보자. 그 안으로 잠시 몸을 숨기고, 마음을 가다듬고, 올바른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보라. 자연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고, 꽃의 언어에 귀 기울여보라.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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