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8장
차살림법의 모양새
기물器物이 주는 힘은 크다. 옛날부터 이름난 차인들 중에는 차에서 기물의 역할을 크게 보고 사용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들이 많았다. 기물이 중요한 이유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우리는 기물을 통해서만 차의 목적과 방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 그 도구를 어떻게 놓아두었는지, 무엇과 함께 둘지에 따라 아름다움의 깊이도 달라지고, 주인의 마음 씀씀이와 차를 통해서 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의 결도 엿볼 수 있다. 일본 중세의 차인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는 기물의 역할에 대해 “비상한 시름은 비상한 사물로만 해결할 수 있다.”라고 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초코파이를 통해 마음의 정을 나누라는 어릴 적 광고처럼 인간의 정신으로 쌓아 올리는 복잡한 마음의 구조물은 기물을 선택하고 다루는 데서 기초하고, 완성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다살림법의 모양새는 요약하자면 이렇다. 제각각의 개성을 하나의 결로 다루어 내는 미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진으로 보면 조금 더 이해가 쉽다.
동다살림법에는 세트가 없다. 그러한 개념을 벗어던지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작가의 편리함이나 소비자의 가성비 추구 따위에 관심이 없다. 한 명의 작가의 것으로 이루어지는 차도구의 세트화 관습에서 벗어나기를 가르친다. 차도구의 역할은 제 자리에서 얼마나 자신이 맡은 일을 잘 수행하냐에 달려 있고 이것은 단지 기능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능만큼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은 때때로 주관적이고 임기응변을 요구할 때도 있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전혀 다른 기분이듯, 오늘 마실 차와 내일 마실 차가 다르듯, 혼자 마시느냐 귀한 사람과 함께 마시느냐가 다르듯이 찻자리를 아름답고 포근하게 감쌀 줄 차도구는 항상 같을 수 없다.
육우의 《다경》을 읽다 보면 드는 생각인데, 그는 그저 차를 즐기고 마실 줄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차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다루는 자세를 갖출 수 있다고 믿었던 이가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을 짧게 요약하자면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 ‘세상에는 대충해도 되는 일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일도 있는데 차는 후자에 속한다. 많이 마시고 싶은 당신의 마음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차를 정직하게 즐기고 싶다면, 한 잔을 마셔도 제대로 마셔보라.’ 그리고 어떻게 제대로 마실 것인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제안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 없던 도구를 새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없던 기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름다움을 총합의 개념으로 본다면 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들은 반드시 제각각의 위치에서 여전히 아름다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는 모양의 우수함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것 옆에 아름다운 것 그사이의 행간을 채우는 노력과 과정의 정성스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동다살림법에는 이 차 한 잔을 마실 사람을 위한 그러한 배려와 노력이 바탕에 녹아 있다. 차수건은 별것 없는 천 조각 하나에 불과하지만, 수백만 원이 넘는 차탁보다 더 큰 정성이 녹아 있지 않은가. 저 하얀 천이 비록 얼룩덜룩 찻물 자국이 남아 있을지언정 삶고 빠는 노력이 무엇에 비할 바 있을까. 그 위에 새겨 놓은 서로 다른 작가의 서로 다른 얼굴들이 주는 묘한 어울림 안에는 그 사람의 취향을 생각하고 오늘의 내 마음을 떠올리며 고른 생각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니 누구와 마셔도 이 차는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 마실 때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마음을 알아줄 상대방도 없고, 보여줄 대상도 없으니 그저 그렇게 마셔도 상관없는 걸까. 동다살림법 안에는 혼자 마시는 이를 위한 차법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차는 혼자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육우의 생각처럼 우리가 차 한 잔 안에 온갖 정성을 들이는 것이 옳다면 그것이 오로지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노력이 예(禮)에 치우쳐 허례허식에 그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는 우리 시간과 삶이 너무 아깝지 않을까. 차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한 잔을 마셔도 마음을 다해야 한다면 그건 나 홀로 마시는 찻자리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리라면 마땅히 우리는 홀로 앉은 내 자리 앞에 또 다른 나를 불러 앉혀 놓는 용기와 노력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이 동다살림법이 홀로 마셔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유다.
동다살림법의 어울리는 모양새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신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정면이나 대각선의 시선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차살림은 하얀 캔버스 위에 서로 다른 질감과 색감으로 완성된 자유로운 추상화 한 점과 같다. 그리고 그 그림은 오늘 찻자리를 만드는 당신과 내가 서로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구도를 가장 잘,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이는 앞에서 어울리는 사람도, 대각선에 앉아 기다리는 친구도 아닌, 차살림하는 본인뿐이니 이 차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오로지 나를 위한 차에 적합한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그 모든 나만의 차의 모양새가 지구 곳곳에서 모두 다르되 동시에 같은 생각을 공유하니 어떻게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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