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새로운 여행 : 차를 만끽하다 04
맞닥뜨렸을 때 해는 빌딩 위로 높이 떠올라 있었다. 아침은 지나고 한낮은 아직 저만치에 있고, 초여름 거리의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반짝거렸다. 아파트 단지 앞 조그마한 상가 꼭대기 층에 있는 차실은 볕이 환히 들어 아늑하다. 차실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그를 만나러 우리가 지나온 거리 풍경이 액자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차실의 주인, 정지현 씨는 오늘도 새벽에 이곳으로 나왔다. ‘새벽차 마시는 시간’을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차 마시는 시간’은 정지현 씨가 지난해부터 이어온 차회다. 새벽 5시에서 7시 사이에 시작해서 한두 시간 동안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한 주 동안 써본 글을 주고받는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각자의 집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앞에 두고 정지현 씨가 보내준 차를 우려내어 마시며 진행하는 온라인 차회다.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차실에서 만나 직접 차를 내려 마시며 공부하기도 한다. 오늘은 아침 7시에 차실에서 차회가 있었다.
‘새벽차 마시는 시간’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는 이미 꽤 두툼한 차 취향을 가진 사람도 있고 차는 별로 마셔보지 않은 사람도 있다. 늘 이른 시간에 기상해온 사람도 있고 아침잠이 많은 사람도 있다. 여느 차회나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고, 여느 차회와는 좀 달리 차가 주인공이 아니다. 차와 함께 하는 새벽 시간, 그 시간 동안의 나를 마주하는 일. 거기에 ‘새차시’의 개성이 있다. 흔치 않은 이 차 모임의 출발은 정지현 씨의 아주 개인적이고 솔직한 일상에서 싹을 틔워 올렸다.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했던 정지현 씨는 결혼 후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일을 쉬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가족이 만들어주는 울타리는 풍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 행복도 여물었다. 나무가 자라는 만큼 볕 아래 그림자도 짙어지는 이치와 같을까. 여럿이 어울려 오순도순한 것과 별개로 홀로 있는 시간이 간절했다. 그래서 시작했다. 아이들이 깨기 전, 한 시간 먼저 일어나기. 아침잠이 적은 아이들은 곁에 없는 엄마를 쫓아 일어났다. 어찌할까. 더 일찍 일어나야지. 그렇게 기상 시간은 여섯 시가 되고, 다섯 시가 되고 네 시가 되고, 지금의 세 시 반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해 새벽을 찾았다. 일어나 거실에 작은 등을 켜고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쌀쌀한 기운을 밀어내려 집에 있는 차를 한 잔 따뜻이 우려 마셔본다. 차를 마시며 뭉근히 데워지는 공기를 음미한다. 그러는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깃든다. 오랜만에 팬을 쥐고 상념들을 두서없이 끼적여본다. 한 달이 가고, 계절이 넘어간다. 그저 선물 받아 쟁여두었던 차는 신경 써서 고른 차로 바뀌고, 매일 한 꼭지씩 빠트리는 일 없이 써나가는 일기장이 꽤 여러 권째다. 어제도 오늘도 이른 잠을 깨어 거실로 나와 앉는다. 그렇게 여섯 해의 새벽을 마주해왔다.
동트기 전 홀로 깨어 작은 차회를 열고 스스로 차를 우리고 마시며 마음을 들여다본다. 단번에 환히 들여다보이지 않으니 차근차근 글로 옮겨본다. 차 한 모금 마시고 감정의 호흡을 고르고 또 한 문장 써 내려간다. 어려운 시험 답안을 써 내려가듯 끙끙댈 때도 있고, 한가로이 구름을 구경하듯 느긋할 때도 있다. 누가 일러주어 시작한 일이 아니니 꼭 따라야 할 틀은 없다. 다만 매일 오롯이 홀로 그 시간을 이어간다. 아내로서 혹은 엄마로서, 관계에서 비롯하는 감정의 실타래가 엉키면 실마리를 찾아간다. 오롯이 나로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들에 관해 묻고 답한다. 작은 결심이 서고, 자잘한 방해가 찾아와 망설이고, 다시 차를 마시며 결심을 다진다.
‘새벽차 마시는 시간’은 그 시간 동안 정지현 씨가 들여다본 제 마음이 열어 준 길이다. 새벽 시간의 유일한 벗이 되어준 ‘차’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차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푹 빠져 배우고 익혀나갔다. 그러는 사이 한 가지 회의와 다른 한 가지 확신이 생겨났다. 곳곳에서 가르치고 배우고 자격증도 주고받는 방식의 차에 관한 공부는 얄팍하거나 편협한 경우가 많았다. 차를 사랑하고 나누는 방식으로서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반면교사를 얻었달까. 다른 한편, 차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나를 변화시켜나가는 힘이 되어 준 차 마시는 시간에 관한 확신과 애정은 한층 단단해졌다. 하나와 하나를 나란히 놓고 답을 내렸다. 사람들과 함께 새벽차를 마셔야겠다. 이른 아침에 차회를 열고 한자리에 모여 각자 저마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새벽차 모임은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차회와 수업에 이어 정지현 씨는 올봄부터 한국 차를 시장에 소개하는 일도 시작했다. 한국 다원에서 만들어진 녹차, 청차, 홍차, 한국에서 나는 찻잎으로 만든 중국식 황차 등을 선별하고 ‘이음제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한다. 이음제이의 차들은 모두 하동 지역에서 만들어지는데, 정지현 씨는 삼 년 동안 여러 차례 지리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일일이 발품을 팔아 좋은 다원을 찾고 차를 맛보고 소개할 차들을 추렸다. 이 기획 역시 새벽차를 마시며 씨를 심고 물을 주고 싹을 틔운 일이다. 차가 좋아져 차를 공부하다 만난 숱한 사람들은 한국 차에 대해 알지 못했고, 모르면서 함부로 낮춰 보곤 했다. 정말 그런 걸까? 제대로 알기 위해 가족과 함께 찾은 산 아래 다원에는 건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차들이 있었다. 한국의 좋은 차를 세상에 바르게 알리고 싶어졌다. 아이와 같이 우리고 나눠 마신 추억의 차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렇게 세상으로 나온 이음제이의 차들은 ‘새벽차 마시는 시간’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알음알음으로 입소문을 타고 차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번듯한 매장에서 번드르르한 포장을 입고 팔리는 차가 아니다. 정지현 씨의 새벽과 차에 대한 진지한 애정을 응원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찾고 나누는 차다. 그렇게 누군가에는 차를 즐기는 첫걸음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이 땅에서도 삶이 녹아든 차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러는 사이 새벽 기운은 물러가고 해가 돋아 머리 위로 둥실 떠오른다. 정지현 씨는 그렇게 한낮의 차실에 섰다.
2021년 입하 날
오랜만에 멀리 여행 온 차살림 그릇들
낯선 일을 시작할 때,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잘 짜인 틀과 형식은 좋은 길잡이가 된다. 짜인 대로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몸에 익고 마음에 익어 내 것이 된다.
때때로 간절한 마음에 순서나 형식을 따질 새 없이 빠져드는 일도 있다. 빠져서 하다 보니 틀이 있고 도구가 있으면 더 좋겠거니 필요한 순간이 뒤따른다. 빌려오고 배워 와서 제 나름으로 알맹이에 맞는 틀을 세운다. 이리저리 바꿔본다. 그렇게 마음이 몸에 맞아 들어 내 것이 된다.
정지현 씨가 고르고 펼쳐본 차살림
차살림 수건 위에서 만난 주인공의 찻그릇과 차살림 그릇이 어우러지다
정지현 씨는 차를 즐기지만, 찻그릇이나 차 도구에는 큰 관심이 없어 긴 세월 찻잔 하나만 애지중지 써왔다고 한다. 차를 우리고 마시는 법 역시 쓰기 편한 대로다. 그러다 우연히 본 신경희 작가의 작품에 마음을 뺏겨 전시장을 찾고 처음으로 찻그릇 세트를 마련했다. 그 인연이 이어져 차살림 공부도 시작했다.
정지현 씨만의 찻자리와 차살림이 만났다. 차살림은 찻자리 꾸리는 이의 마음 이끄는 대로 완성하는 것. 이것과 저것을 한데 모아 본다. 찬찬히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쏟은 딱 그만큼을 솔직하게 내 것이라 말하는 성품이니, 자신만의 찻자리를 만들어나갈 앞으로의 모습도 기다려진다.
이야기를 나누며 대접받은 이음제이의 햇차들
매일 새벽차 마시는 시간을 함께하는 책상 위 카메라와 마이크와 책들
손때 묻은 찻그릇과 보듬이
반짝이는 눈빛과 솔직함이 멋진 정지현 씨
토요일 한낮의 차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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