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4장
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차 우리고 마시는 행위를 한자로 말했다. 많은 이들이 다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행다를 한다’ 표현했다. 둘 다 틀린 말이다. 다도는 일본의 차노유(茶の湯)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부르기 시작했는데, 정작 일본에서 다도(茶道)란 차인이 일반의 단계에서 명인의 단계로 오르는 명확한 수준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누구나 편하고 즐겁게 마시는 일상의 차를 이르는 말이 아니고, 형식을 갖추어 마신다고 해서 역시 그럴듯하게 가져다 붙일 단어도 아니다. 행다(行茶)를 차 우리고 나누어 마시는 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도의 경우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이다. 사람이 모여 함께 차를 마시고 나누는 일을 순서와 법으로 만든 최초의 시절부터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찻자리에는 시자(侍者)가 있었다. 그들은 뒷방 혹은 미즈냐(水屋)에서 도구를 준비하고, 차를 달이거나 순서를 챙기기도 했으며 본실에 나와 손님에게 차를 옮기고 빈 그릇을 거두는 일을 도왔다. 문자 그대로 차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기에 행다(行茶)였다.
물론 세상에 없던 말을 만들어 내는 일은 어렵다. 조어(造語)의 기술은 쉽지 않다.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가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 능력 때문이다. 덕분에 영어나 스페인어는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넓이가 한층 넓어졌다. 플로베르는 그들과는 달랐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언어의 관념적인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했다. 절반의 풍자와 절반의 번뜩임으로 통상의 관념이 가 닿지 않은 달의 뒷면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결과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흥미롭기 그지없다가도 동시에 내가 쓰는 단어가 과연 적절한가 싶은 걱정이 들기도 한다. 석가모니는 말 한마디 없이 오직 꽃 한 송이를 들어 제자 마하가섭의 염화미소를 이끌었지만 깨달음과 거리가 먼 우리에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센 리큐는 차를 통해 아름다움의 극의를 깨닫고, 도(道)의 길에 접어들 수 있음을 역설했지만 정작 우리는 차 마시는 일을 부르는 말 한마디 정하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살림이라는 단어를 저 구석진 선반에서 꺼냈다. 살림은 누구에게나 흔해 빠진 단어다. 너무 흔해서 가치도 떨어졌다. 살림을 산다는 말은 왠지 부끄럽다. 살림살이는 누군가의 아래에서 하는 허드렛일처럼 다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살림은 ‘살다’ 그리고 ‘살리다’와 같은 말이다. 너무 흔해서 정말 놀랍게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살림은 누군가를 살고 살리는 일이다. 살림은 삶을 돌보는 꾸러미들을 이리저리 꾸려 펼쳐 놓고서 우리가 죽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티게 돕는 일이고, 조금 더 나아가면 버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가능하면 즐겁고 활기차도록 북돋는 일이다. 그러니 여기에 차를 녹이는 일은 어렵지 않고, 불가능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도나 행다라 부르지 않고, 차살림이라 부르기로 했다. 동다의 새로운 뜻도 밝혔으니 한데 더해 동다살림이라 부르면 더욱더 좋겠다. 창안자는 이러한 차살림은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생각과 행동을 풀어 삶의 분노와 두려움을 다스리는 일’이라 그 목적을 밝혔다. 재미있게도 고정관념을 이르는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의 기원은 희랍어 stereós와 túpos가 합쳐진 것이다. 앞의 단어는 고체를 말하고, 뒤의 단어는 때리거나 누르다는 뜻이다. 그러니 고정관념의 옛말은 고체처럼 꽉 막히거나 눌려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 살림이라는 단어만큼 딱 알맞은 해결방법이 또 없다. 살림살이에는 필수로 물을 많이 써야 하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살림이란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한 이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이 물질이 될 수도 있지만, 영혼의 문제일 수도 있다. 내 어머니의 살림살이가 비단 배고픈 아들을 먹여 살리는 일에 그치셨을까. 내 어머니가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내 딸아이를 위한 나의 살림에는 필요한 것을 넘치게 채워주는 것 이상의 마음가짐이 있다. 콩이나 잣 몇 알, 쌀 몇 톨, 고기 몇 그램을 더 주고 덜 주는 문제가 아니다. 살림에는 철철 넘쳐 흐르도록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예쁘고, 단단한 마음이 있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는 남이기에 이것저것 다 모아서 쌓아두었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넘치게 쌓아 놓아도 정작 본인은 모르기에, 넘치는 것들이 썩고 부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유불급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받는 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주는 이가 차곡차곡 필요한 것을 채워 넣어 삶의 온기와 숨결이 부족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이 매커니즘을 우리는 살림이라고 정의한다.
그렇게 펼치는 차살림이 봉사나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살피고 살리는 이 행동의 가장 큰 수혜자는 나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차살림은 누구를 살리는 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조금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살림은 필연적으로 호혜로운 일이다. 단순히 누군가를 도와서 느끼는 뿌듯함을 넘어 보다 나를 주체적으로 돌아보고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간 무시했던 살림살이가 그저 가족을 위한 엄마의 희생쯤으로 치부되었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 엄마의 인생이란 곧 희생이라는 공식을 강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살림이라는 좋은 뜻에 저 구시대적인 생각은 어울리지 않는다. 차로 말미암아 펼치는 살림의 세상에는 길눈이(주최자)와 손(객체)이 평등하다. 누군가는 차를 우리고, 누군가는 차를 마시겠지만 그 관계 안에는 주시와 관찰, 고마움과 존경, 삼가는 마음과 위로, 부러움과 용서, 너그러움과 관조, 비밀스러움과 떳떳함 같은 무수히 많은 감정의 조각들이 부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진실의 파편들이고, 숨길 수 없는 참된 마음의 편린이다. 화기애애 할 수도 있고, 용서하는 자리일 수도 있고, 쭈뼛대며 차마 털어놓지 못한 자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차살림의 세상 안에는 딱딱한 것들을 흐물흐물하게 녹여내고,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는 힘이 있다. 그 가능성의 덩어리를 붙잡고 한 번 나아가 볼만 하지 않겠나.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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