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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자리수건을 펼치며 추는 춤, 두 번째


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11장


자리수건 끝자락을

살포시 던져 펼친다는 것











흑백으로 남아 있는 김숙자의 도살풀이춤을 보면 호리호리하고 왜소한 체구 안에 숨은 힘이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그녀의 춤사위 안에 압박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녹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느린 박자와 움직임이 한몫하기도 하지만 압박감이란 단지 그것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던지는 촘촘한 그물망이랄까.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가 과녁을 향해 날아가기 직전의 그 떨림 같달까. 쉽게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그 느리고 정적인 움직임 안에 도사리고 있다. 움직이지 않아도 안광에 압도되는 호랑이처럼, 작은 체구와 느린 움직임 안에서, 우리는 긴장하고 다소 불편하다.

살풀이는 무당굿에서 몹시 일상적인 의식에 속한다. 앞선 이야기 끝에서 언급한 바대로 살풀이는 해결보다는 예방에 가까운 것이었다. 살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인과에 의해 생길지 모른다. 흔히 아는 것처럼 상가에서 업어 올 수도 있지만 사랑과 축하만이 존재할 것 같은 돌잔치에서도 둘러메고 돌아올 수 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어도 살은 낀다. 태어나기로 살을 얻어 난 사람이 있고, 그저 사랑해서 만났을 뿐인데도 살은 그 안에서 피어나기도 한다. 무당들이 말하기로 가장 흔한 살 중 하나가 부부끼리 만들어내는 살이란다. 역설적이다.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기로 결혼했지만, 살을 부대끼며 만들어내는 인연의 씨앗이 살을 피울 정도로 원한을 꽃피우기도 한다. 그렇기에 살풀이는 해결 방안으로서의 풀이이기도 하지만, 닥쳐올 불안한 미래를 예방하기 위한 풀이이기도 했다. 운명의 예방주사랄까.


무당은 살이 끼었거나, 예방하고자 하는 사람을 밖을 향하여 앉힌다. 보통은 안방이나 자신이 오래 머무르는 방을 기준으로 마당 쪽으로 난 문 안에 앉는다. 밖을 바라보고 편안하게 앉은 이의 머리 위에 그 사람의 땀이 흠뻑 밴 속옷을 덮는다. 그러고는 콩이며 팥, 좁쌀, 수수, 쌀과 같은 각종 곡식을 머리 위로 해서 마당 쪽으로 힘 있게 뿌리면서 주언(呪言)한다. 이것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복숭아 나뭇가지로 활을 만든다. 그리고 화살에 메밀떡을 꽂아 밖으로 힘차게 쏘아 보내면서 조언한다. 십중팔구 그 정도로 해결되지 않는 살은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점은 이 의식의 작동방식이 모두 안에서 바깥으로 무언가를 힘차게 내던진다는 것이다.

살풀이춤은 기본적으로 긴장과 이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무한한 반복이다. 마치 에셔의 <그리는 손>처럼 긴장은 박자를 꽉 채워서 이완을 준비하고, 이완은 이후에 다가올 긴장을 마주한다. 전문가들은 춤사위에서 이러한 과정을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표현한다. 정(靜)이란 고요함을 말하니, 천천히 조용하게 거의 움직이지 않고 감정을 안에 담고 있는 상태다. 중(中)은 정과 동의 가운데 지점으로 긴장 상태를 유연하게 풀어내기 위한 단계다. 이는 동작으로 표현된다기보다는 보다 심리적인 단계에 가깝다. 이완을 통한 해방감을 풀어내기 위한 그 직전 단계니 어쩌면 쉽게 말해 마음먹기 정도로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동(動)이란 감정의 발산이고, 개방감과 시원함을 동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중동은 그 한 번의 실행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동(動) 이후에 그 여운을 즐길 겨를 없이 곧바로 정(靜)으로 이어진다. 미적으로 이러한 반복행위는 일종의 지속성을 표현하고, 가능하게 해준다. 끊어지는 듯이 이어지고, 움직이는 듯 멈추는 일련의 과정의 연속은 긴장이 극에 달해 터져버리고 나면 찾아오는 허망함을 결과로 보지 않고, 반대로 이완이 끝없이 이어지며 아무것도 필요 없어지는 허무를 결과로도 보지 않는다. 마치 계절이 순환하듯 농사로 지력이 소모되고 나면 혹독한 겨울을 지나며 땅이 힘을 회복하듯 삶은 계속 이어지고 춤사위는 지속된다.

언뜻 매우 지루해 보이는 이 춤사위가 결과적으로 감동적인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내면이 작동하는 원리도 결국 이러한 자연스러운 과정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면이란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아서 함부로 다루었다가는 부서져 버리기 십상이다. 한 번 깨진 유리는 전처럼 되돌리기 불가능하고 그래서 천천히, 신중하고, 무겁게 움직이고 다루어야 한다. 안에서 바깥으로 내던지는 무당의 손짓 안에는 곡식도 있고 메밀떡이 꽂힌 화살도 있겠지만 이에 묶여 날아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채 내 안에 꼭꼭 숨어 있던 부정(否定)과 과거일 것이다. 그렇게 날아가 버리고 후련해진 마음 안에는 살면서 마주칠 또 다른 불운과 시련이 쌓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하지만 동시에 힘찬 마음가짐으로 단호하게 이를 밖으로 내던져야 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역동적인 것투성이다. 10분짜리 클래식 한 곡 듣기는 불가능해 보이고, 5분짜리 노래 한 곡도 끝까지 들어주기 힘들다. 설명은 지루하니 세 줄 요약만이 살아남는 시대를 산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쌓이며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그런 역동성만으로는 다룰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가 오더라는 점이다. 그때가 오면 비로소 조금 지루하더라도 무겁고, 천천히 무언가를 다루고, 되풀이하는 행위의 참뜻을 느끼게 된다. ‘천천히 그리고 다소 무겁게’ 건반을 누르는 지시 방법을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gio sostenuto)라고 한다. 베토벤 소나타 14번 1악장 ‘월광’이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악장 도입부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주 기법을 삶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영화의 도입부에 글랜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 골드베르그변주곡 BWV 988번이 등장하는데 이 버전은 굴드가 젊은 시절 녹음했던 푸릇푸릇한 곡이다. 1955년에 연주한 이 버전은 38분 27초가 걸렸는데 잘은 모르지만, 전문가들이나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것은 대단한 기행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지나치게 빠르고 기이한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굴드는 평생에 걸쳐 똑같은 곡을 두 번 녹음하기를 꺼렸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마지막 녹음이 1980년에 성사된 이 곡이었다. 25년이 지난 후에 그가 선사한 버전은 천천히 그렇지만 무겁고 진중하게 한 음 한 음 눌러가며 51분 15초가 걸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로 이 버전이 흘러나온다. 2013년에 나온 영화라도 스포일러는 금물이니 내용을 말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수고로움에 그치는 것을 넘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굴드 역시 25년의 피아노 인생이 13분여의 빛나는 성장으로 말미암았다는 점일 것이다. 살풀이하며, 살풀이춤을 추며 던지는, 차살림을 하며 던지는 이 차수건은 그만큼의 무게감을 가질 것이고 그 무게감은 쉽사리 흔들거리는 생활의 가벼움이 주는 불안함을 막아줄 예방주사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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