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여행 : 특별편
마드리드의 세 여인, 왼쪽부터 리차드, 파멜라, 매튜
스페인에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묻는 말은 뻔하다. 스페인이 그렇게 좋다던데 정말 좋아요? 나는 이 질문에 몇 가지 이야기로 대신 대답하곤 한다. 산업화가 늦었던 스페인은 16세기까지는 라이벌로 생각한 적도 없던 독일에 19세기 이후 많은 것들을 빚지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스페인인들을 더러 이렇게 말했다. ‘시끄럽고 불결하며 지나치게 열정만 앞서 일을 그르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언어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어는 사랑을 속삭이기 좋은 언어고, 스페인어는 신과 마주 대화하기 좋은 언어다.’ 바로크 시대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자기 민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도원 안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곳에서는 험담과 욕설이 문간이나 기둥 뒤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우연히 이를 듣고 분숫가로 가 귀를 씻는 이들로 언제나 분주하다.’ 스페인의 하늘은 파랗거나 검거나 둘 중 하나고, 사람들은 사랑하고 있거나 욕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며, 신과 대화를 하거나 남과 대화를 하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마드리드에 발을 디뎠을 때도 하늘은 맑았다. 공항에서부터 웅성대는 사람 목소리는 식당이나 카페, 골목에서도 어김없이 들린다. 끊임없이 할 말 많은 사람들은 원시적인 에너지가 넘실거리고 그에 걸맞게 호기심도 많아 보인다. 백 명의 사람이 백 가지의 의견을 가지고 토론한다던 어느 스페인어 교수의 말이 생각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많은 충돌과 갈등이 이곳저곳에 넘쳐날지 상상이 가는가.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건 지극히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특유의 사고방식일 뿐이다. 우리에게 백 가지 의견은 갈등이겠지만 이들에게 백 가지 서로 다른 말들은 놀이의 재료다. 무한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정보들을 수집하고, 동의할 만한 부분은 동의하면서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치 퍼즐을 조립하듯이 앞에 했던 말과 새로 얻은 정보들, 옛날에 경험했던 이야기들이 버무려져서 여럿이 모여 떠드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한 편의 단막극을 보는 듯하다.
오늘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우리는 마드리드에서 현지인들이 사는 맨션 한 호실을 임대해 머물렀다. 파멜라(Pamela)와 나는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였다. 널찍했던 그 사적인 공간에 머물며 우리는 마드리드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콤플루텐세대학가(Complutense de Madrid)에 위치했던 까닭에 주변의 여러 저렴하고 깨끗한 시설물들을 이용할 수 있었고 산책하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던 고마운 호스트를 차회에 초대하기로 했다. 파멜라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와도 괜찮은지 물었다. 그들은 낯선 이의 초대에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 마음이 고마워 우리는 우리가 가져갔던 그릇 중에서 가장 아끼던 것들을 꺼내어 놓았다.
차살림은 간편하게 이루어졌다. 차살림은 바닥에 흰 차수건을 펼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에 파멜라가 준비한 갈색 천 위에 자리수건을 펼쳤다. 청자와 분청, 백자와 유색 자기들이 알알이 모여 손님을 대접했다. 파멜라는 그 대접에 걸맞게 두 명의 친구를 데려왔다. 자신의 이름을 리차드(Richard)와 매튜(Matthew)라고 소개한 이 두 명의 여성은 우리가 꺼내 놓은 보듬이들을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들의 반응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차회와 동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두 시간이 넘게 이어졌지만, 그들은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게 열 가지가 넘는 질문이 끝나고 내가 우림이에 물을 넣어 찻물을 우려내 식힘이에 따르면 왁자지껄하던 셋은 약속이나 한 듯이 순간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를 우리는 동안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집중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물줄기가 보듬이에 떨어지며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감싸 쥐고는 서로 웃으면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파멜라 “이건 달인가? 뭐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했는데, 가만히 보니 이건 달Luna이잖아!"
-매튜 “그냥 달이 아냐, 보름달(Luna llena)이지.”
-리차드 “보름달도 맞지만 이건 상아(Marfil)로 깎아 만든 것 같은데.”
-파멜라 “상아라니! 말도 안 돼! 호수(Lago)가 있다고 상상을 해 봐. 여기 그릇에서 비치는 음영이 마치 호수 위에 뜬 달(Luna llena en el lago) 같지 않니?”
-매튜 “달 안에 호수가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달이 있다고? 말이 안 되잖아?”
-파멜라 “말이 그렇다는 거야. 상상력을 발휘해 봐. 이렇게 자연스러운 감촉에 이 색깔이라니. 차도 노래서 흔들거리는 것이 꼭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
-매튜 “그래. 달이 밝은 밤에 레띠로공원(El parque del retiro) 호수에서 조각배를 젓다 보면 이런 느낌이 들긴 하지.”
-리차드 “상아라는 아까 내 말이 잘못 표현된 것 같네. 상아라기보다는 옥(Jade)에 가까운데, 정확하게는 옥으로 만든 분수(El fuente del Jade) 같아.”
-파멜라 “넌 옥이 무슨 색깔인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리차드 “알아. 색깔만 보지 말라고. 옥이 주는 느낌을 떠올려 봐.”
-매튜 “뭐든 간에 정말 편한 건 사실이다. 손에 꽉 차고 따듯해서 참 좋네. 후후 불어가면서 마실 필요도 없고.”
-파멜라 “영감을 주는 것 같아서 좋아. 작가의 사랑이나 열정 같은 게 느껴져서 더 좋아. 이 그릇은 쥐면 쥘수록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가는 고요함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느낌이야.”
-리차드 “아마 이 표면의 고운 흙 같은(earthy) 질감 때문일 거야.”
수많은 말들이 찻자리 주변을 맴돈다. 조용히 홀로 앉아 나를 관조하는 아침의 찻자리도 좋지만 이렇게 왁자지껄 아름다움의 정체에 대해 떠들어대는 찻자리도 좋다. 솔직하고 가감 없이 묻고 답하고 의견을 말하는 경험은 우리에게 흔치 않다. 생각해 보면 왜 차를 마시고 좋아하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답과 멀지 않다. 나는 차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맛있고 몸에도 이롭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차는 생각을 무르익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곱씹어보고 답을 찾는 데 꽤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은 멋지지만 가끔은 고난의 길을 자처한다는 느낌도 든다. 마치 고요한 아침 녘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신과 대화하는 수도승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다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변비 걸린 공무원처럼 말하는 밀턴의 《실낙원》 속 신과 대화하는 것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광기 어린 히스클리프를 만나 한잔하는 쪽이 낫다. 수다스럽고 적극적인 오늘의 찻자리에서 나는 느꼈다. 고요한 찻자리만이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 우리가 저 세 명의 모이라이 자매들을 만나 행복했던 것은 그들이 내뱉는 시적 표현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운율감의 즐거움, 어휘의 가짓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찻자리를 마주하는 그들의 긍정적인 태도와 솔직함 덕분이다.
종종 우리는 가식적이고 불편한 찻자리를 만난다. 주례사 같은 칭찬이 오가고,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예쁘고 잘 어울린다며 칭찬해주어야 한다. 얼마나 비싸고 고급스러운 한복을 입었는지, 머리에 얼마만큼의 돈과 시간을 들였는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찻자리를 개운하게 벗어 던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롯이 차를 즐겼던 적이 당신은 언제였는가.
허공에 붕 하고 떠서 곧 사라져버리는 맛없는 말들 말고, 소란스러워도 진심을 담고 주제를 직시하는 이야기는 주변에 오래 머문다. 피곤했던 오랜 여행길을 잘 추스르게 도와주었던 파멜라와 리차드, 매튜에게 감사한다.
글 _ 정 다 인
사진, 기획 및 편집 _ 정 다 정
거의 술자리에 가까운 찻자리로군요ㅎㅎ 글을 읽는 동안 저도 잠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한국어는 무엇을 하기에 좋은 언어일까, 하고 잠시 궁금해지는군요... (스페인어 부럽)
보름달 같기도 하고, 차가 솟는 분수 같기도 하다는 사진 속 보듬이를 저도 한번 손에 쥐어보고 싶네요. 여행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