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여행 03 : 다시 봄, 일출보듬이의 여행
봄이 들 날을 며칠 앞두고 남녘에 눈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 나는 구미로 향했다. 구미는 예로부터 역동적이고 분주한 사람들이 살던 도시였다. 비단 현대에 와서 조성된 산업단지 때문만은 아니다. 조선 시대 『택리지』에는 구미의 옛 이름, 선산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 게다가 구미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반드시 쉬어가는 역참이어서 구미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이 오고 갔다. 자고 나면 떠나는 이도 있었지만 일어나면 못 보던 얼굴이 있었다. 이 분주한 땅에서는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중요하다. 그 한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 이화자 님의 차실인 구미청다례원이 있다. 이제는 조금 빛바랜 구시가지가 되었을지 몰라도 수년 전 구미를 상징하는 번화가였을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
구미청다례원은 이화자 씨가 IMF 시절 이전부터 꾸려온 곳이다. 그녀가 차를 마시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차의 이로움을 배우고 즐기기 위해 설립한 이곳은 본래 그녀의 집에서 비롯했다. 일이 년의 시간이 흘러 몇몇 동료들과 함께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이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역 앞 왕복 이차선 도로변은 이곳이 그간 보낸 시간의 폭을 말해주는 듯하다. 십층을 넘지 않는 길가 건물들은 마치 담벼락 같이 정감 있다. 구미청다례원이 들어선 건물의 회색 벽과 계단을 따라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는 길이 삼층에 이르면 콘크리트와 시멘트의 삭막함은 나무의 갈색 온기와 조약돌의 수수함에 잊혀 점점 사라진다. 차실 안에 들어서면 무수히 많은 이들이 밟고 사용했을 나무로 짠 수납장과 회원들이 수십 년에 걸쳐 사용했을 손때 묻은 차도구들이 가득하다.
곧 여든을 앞에 둔 이화자 씨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렸다. 성인 남자의 어깨에 겨우 가 닿을까 싶은 작은 체구지만 그녀와 대화하다 보면 당당함에 감탄하게 된다. 스핑크스 앞에 처음 섰던 오이디푸스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달까. 말은 유연하며 재치가 넘치는데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날아가는 듯하지만 결국 과녁에 꽂히듯 날카롭고 힘이 있다. 작은 거인이 앉아 기다리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보고 반해 그곳을 터전으로 삼았을 것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배움이 깊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때로는 큰 무게로, 때로는 유머러스한 가벼움으로 포용하며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켰다. 이화자 씨의 곁에는 제자보다 동료가 더 많아 보인다. 제자조차 동료로 삼을 줄 아는 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이화자 씨의 주위를 감싼다.
이화자 씨는 오랜 세월 약사로 살았다. 연배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오래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삶에 들어온 차는 처음부터 멋과 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차의 약리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이화자 씨는 약사답게 차가 단지 맛있는 음료일 뿐 아니라 건강에 이로운 식품이라는 데 주목했다. 마침 당시에 들고 있던 잡지가 80년대부터 발행되었던 오래된 잡지 『설록차』였다. 이화자 씨는 그렇게 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차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차를 배우는 날이면 약국에는 직원을 세워두었다. 이화자 씨는 당시 대구 일대에서 이름 있던 1세대 차 선생 배근희 선생을 찾았다. 그녀에게서 차를 배웠고 당시 유행하던 소위 행다行茶 -사실 ‘행다’란 찻자리 주재자가 내린 차를 손님에게 나르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행다'를 마치 차 문화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해 온 것은 20세기 한국 차 문화계에서부터 시작된 실수다.-라 부르는 기교도 익혔다. 차라는 식물의 효능에서 이를 우리고 다루는 과정의 형식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하여 절차에서 우러나오는 예절을 배우는 것으로 관심이 옮아갔다. 그녀는 이렇게 차 하나에서 퍼져나가는 다양한 배움을 홀로 즐기고만 싶지는 않았다.
이화자 씨는 자격을 얻고 난 뒤 1996년 자신의 집에 구미청다례원을 차렸다. 그녀가 배웠던 다도의 경험을 공유하고 때로는 남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2년 즈음 뒤에 현재의 자리에 정식으로 다례원을 세웠다. 그러니까 이곳은 약사로서의 이화자 씨의 인생 전반부를 잇는 인생 후반부 그 자체이며 그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공간인 셈이다.
공간이 지닌 힘은 주인의 성향에서 비롯한다. 그 나이만큼 채워진 무수히 많고 깊은 인연의 힘이 정동주 선생과의 만남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무엇을 차라 부르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남들보다 영민하고 유려한 재능으로 일찍이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기존의 다도 수업과 수련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 다도는 무엇이고 누구를 위해 왜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침묵했다.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드물었고 가르쳐주는 이는 더 드물었다. 차의 정체성이 모호하니 누구를 위해 무엇을 골라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 지는 더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이화자 씨는 정동주 선생을 만나고 차살림과 동장윤다를 배우고 알아가며 비로소 ‘이화자의 차’가 나아갈 방향을 세웠고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를 키웠다. 그녀의 차는 혼자보다는 같이 하는 데에 있으며 나를 포함한 너를 위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녀의 삶이 그랬다. 그녀의 찻자리에서 ‘나는 너와 함께’ 있어 의미가 있다. 남을 보살피고 건강한 삶을 살게 하는 약사라는 직업을 가졌을 때나, 차가 가진 효능에 관심을 가지던 때도, 처음으로 차를 배우기 위해 동료를 찾고 이끌던 때나, 자격을 갖추고 공간을 세워 뜻을 펼칠 때도, 그녀는 언제나 남을 자신보다 앞에 세우고 반걸음 뒤에 섰다. 그런 이유로 주변이 기억하는 그녀는 가장 앞에 서지 않아도 누구보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남긴 나이에 관한 격언에 따르면, 일흔을 이르는 말은 종심從心이다.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欲不踰矩에서 따온 말인데,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저 종심에 이르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있을 것이다. 이화자 씨는 그 몇 가지 방식 중 자신의 한 가지 식을 갈무리 해 이룬 사람이 아닐까 싶다. 혼자보다는 같이 하는 삶의 방식이 익숙해지면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여도 자연스레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 되는 것. 그러니 그 오랜 세월을 두고도 여전히 법도를 벗어나지 않아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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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보듬이의 여행, 첫 번째 주인공은 유태근 작가의 청화백자, ‘일출보듬이’다.
이화자 씨는 일출보듬이를 쥐고는 추억에 잠기며 옛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어렸을 적 고무찰흙을 자주 가지고 놀았다 했다. 그녀는 유태근 작가의 그릇을 여럿 가지고 있지만, 여행의 주인공, 일출보듬이를 본 것은 처음이다. 일출보듬이를 쥐고 있으니 오랜만에 칠십 년도 더 지난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그 고무찰흙 장난감이 생각난다며 환하게 웃었다.
글과 사진_정 다 인, 구미 청다례원 이화자 선생님을 만나뵙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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