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여행 : 봄, 천둥번개보듬이의 여행 2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앉아 있는 진료실에 들어가면 괜스레 긴장된다. 제아무리 똑똑한 인간도 자기 몸이 아픈 까닭은 잘 알 수 없기에 하얀 가운이 주는 권위에 의지하게 된다. 의사는 성스러운 선약이 새겨진 하얀 가운 아래서 끝없이 끝말잇기를 해나가고, 더러는 자신의 책무를 넘는 감정노동을 하기도 한다. 본분을 잊은 사람들의 세상 안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이런 의사들이 있어 우리의 하루는 또 한고비 넘어간다. 생각해보면 그럼 그 하얀 가운을 입은 근엄하고 진지한 의사의 병은 누가 달래주나. 의사도 사람이라 똑같은 희로애락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가끔 잊곤 한다. 이름을 잊어버린 어느 시인이 술잔과 담배꽁초 안에 의사들의 쉼터가 있다는 말을 했는데, 오늘 우리가 만난 ‘천둥번개 보듬이의 여행’ 주인공은 그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김계숙 씨는 52년을 의사로 살았다. 불과 몇 해 전, 일흔아홉의 나이가 되어서야 병원 진료실 문을 닫고 의사 생활을 마쳤다. 평생 수많은 이들의 건강을 돌보고,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얄궂고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의사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고를 당했다. 교통사고였다. 그는 몸을 다쳤고, 이내 이겨냈다. 그리고 다시 아프게 되었다. 이번에는 병마가 찾아왔다. 김계숙 씨는 한평생의 자랑이자 업적이며 동시에 짐이었던 흰 가운을 벗자마자 병마와 싸우게 된 셈이었다. 언젠가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너무 빨리 찾아왔다.
여든이 넘은 그녀는 연달아 몸을 다치고 병을 얻어 회복 중이었음에도 얼굴에 기백이 넘친다. 한국이라는 사회를 팔십여 년 겪은 이들 중 그만큼 멋진 눈빛을 가진 어른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나는 궁금했다. 그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은 무엇에서 비롯하는지.
그는 의사 생활의 대부분을 서울 여의도에서 이어왔다. 여의도 개업의 1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여의도와는 달리, 당시 그곳은 금융이나 정치뿐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면에서도 서울의 으뜸가는 지역이었다. 수많은 화가와 작가들, 언론인들과 정치가들, 경제인들이 한데 모여 이른바 모던타운을 형성했던 터라 김계숙 씨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녹록지 않았다. 상상해보기 그리 어렵지 않은 풍경이다. 까다롭고 동시에 까닭 없이 권위적인 사람들을 진료하는 일은 그를 더욱 다부진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만들었다. 동시에 김계숙 씨는 훌륭한 남편의 더없이 훌륭한 아내였고, 그보다 한 가정의 어머니였다. 의사로서 바쁜 생활에도 불구하고 주부로서도 소홀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해야 하는 일’에 관해서는 가히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김계숙 씨는 매사에 소홀함이 없는 성품에 의사라는 직업을 좋아했고 보람을 느꼈지만, 그도 지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위안 삼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갑갑한 진료실을 벗어나 거리로 나섰고, 발걸음은 그림을 볼 수 있는 갤러리 골목으로 향했다. 그림을 보러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도 휴식이었지만, 어쩌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마주치면 그 날은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 그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사기로 마음먹고 병원으로 돌아오면 그림 삯을 모으기 위해 또 열심히 진료를 했다. 그 수십 년의 결과가 바로 그의 집 안에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그날도 그는 답답한 마음에 거리로 나왔다. 골목을 걷다 아주 작고 투박한 나무 팻말에 이끌려 <원화랑>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 현대 미술품 전시의 서까래 중 하나로 불러도 될 그 화랑의 노 주인이 역시나 중년이었을 적 얘기다. 무언가에 홀린 듯 삐걱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 따르릉 울리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한 작품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한 그림을 가져본 적 없던 그는 용기를 내 작품의 출처를 물었다. 주인은 대꾸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이내 아쉬운 듯 답했다.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노라고. 평생에 걸쳐 어쩌면 가장 큰 용기를 낸 것일지도 몰랐던 그는 그 용기의 크기만큼이나 맥이 풀렸다. 하지만 주인은 그런 김계숙 씨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잠시만 기다려보라 했다. 그는 어디론가 가게 뒤편으로 들어가더니 주섬주섬 그림 한 장을 가져왔다. 주인장은 대뜸 그녀에게 꺼낸 온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때는 1980년대 중후반이었고 올림픽도 치루기 이전 우리 사회에서 요제프 보이스의 그림은 단연코 생소하고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계숙 씨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큰 망설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이 좋다고 말했고, 주인은 대뜸 가지고 가라 답했다. 그는 의사였지만 의사라고 모두 떼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그림을 살 돈은 없었지만 좋은 눈과 깨끗한 마음이 있었다. 안목으로 장사하는 화랑 주인답게 그는 김계숙 씨의 두 가지 면을 알아보았다. 이건 팔지 않고 혼자 가지고 있으려던 그림이었으니 천천히 갚으라고 했다.
그날로부터 그는 그림과 원화랑 주인 정기용 씨와 인연을 맺었다. 한 달 열심히 일하고 화랑에 들러 대금을 갚는 생활이 이어졌다. 십수 개월에 걸친 할부가 끝이 나고 자신의 집 벽에 걸린 요제프 보이스의 판화 한 점을 보았던 그 기분이 김계숙 씨는 잊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으레 아는 부잣집 마나님의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그림 수집과는 격이 다르다. 그가 손에 넣게 된 이 한 점을 계기로 그녀의 삶 안에 미술이 깊이 자리매김했다.
그림에서 비롯한 미술 애호가의 삶은 찻그릇에 대한 애정으로도 번져나갔다. 특히 정동주 작가가 십수 년 전에 출간했던 <우리 시대 찻그릇은 무엇인가>는 김계숙 씨가 젊고 재능 있는 도예가에게 관심을 두게 해주었다. 책에 소개된 열네 명의 작가 중 당시 매우 젊은 축에 속하던 김종훈 작가에 관한 글 한 꼭지는 그를 경북 성주 산골, 김종훈 작가의 가마로 이끌었다. 그 이후로 김계숙 씨는 한층 더 찻그릇과 차를 좋아하게 되었고, 오늘의 인터뷰에 이르게 되었다.
김계숙 씨는 천둥번개보듬이 역시 뛰어난 역량의 젊은 작가가 빚은 그릇이라는 데에 주목했다.
“얼핏 원시시대 토기 같아 보이는데, 굽이 없는 그릇이라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보고 만질수록 편안하고 매력적이군요. 무엇보다 천둥번개보듬이를 세상에 내놓은 작가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그림과 그릇에 대한 김계숙 씨의 애정은 예술에 인생을 맡긴 젊고 그래서 삶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김계숙 씨의 한강 변 자택에 방문했을 때는 점심으로 넘어가는 주말의 한가로운 오전 시간이었고, 그는 남편과 함께 얼굴에 한껏 온정을 품고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병마와의 싸움을 놀랍도록 훌륭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한강이 흐르고 그 너머에 여의도가 눈에 들어온다. 햇빛이 잔뜩 쏟아지는 밝은 실내의 모든 구석과 벽면 가득히 채워진 그림과 도자기, 오브제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동질감이 느껴진다. 모두가 주인과 닮았고, 모두가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티가 나기 때문이다. 그림의 색을 한껏 즐기기 위해 유리 액자에도 넣지 않은 대가의 작품부터 사랑해서 만지고 만져 반질거리는 도자기까지, 집 안의 모든 것들이 그의 삶과 멋진 얼굴을 잘 설명해 준다. 젊은 시절 고단한 일상을 견디게 해준 그림과 그릇들이 지금은 병을 치료하고 돌보는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은 건실하고, 티 없이 깨끗하며, 순수하다. 그녀를 통해 사랑하고 아낀다면 더 가까이 가서 보고 만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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