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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수집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다


보듬이의 여행 04 : 다시 봄, 일출보듬이의 여행






이혜진씨와 일출보듬이


먼저, 높고 좁게 난 직사각형의 쇼룸을 따라 선 길쭉한 나무탁자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밝은색 페인트의 벽면 아래 창가의 가로로 긴 묶음 커튼에 감도는 보라 빛깔이 반짝일 것이다. 아일랜드와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마주보고, 개화기 조선과 에도풍의 화란양식이 서로를 견주는 가운데로 어깨 하나 지나갈 복도가 보일 것이다. 복도의 오른편으로 흰 바탕의 타일이 가득 보일 것이고, 하얀 톤을 배경으로 수십 가지 서로 다른 질감의 식기들이 보일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빈틈을 어깨로 밀어내는 소품들 사이로 린넨이 반듯하게 접혀 서로의 구획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유리문 너머 한 걸음 밖에서 햇볕을 쬐는 한옥의 오랜 목재들과 나무로 만든 격자 틀 안에서 얇게 흔들리는 유리는 주인의 어린 시절과 서로 공명하고 있을 것이다. 19세기 아랍풍을 본떠 만든 짙은 양탄자 색채 위로 입식의 티테이블이 서 있을 것이고, 그 둘레로 나이와 출신을 따지지 않고 들어선 분청과 백자, 유색의 찻그릇과 화병들이 당신을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미닫이 넉 장의 문을 열면 아무것도 없는 사각의 공간에서 차 한 잔 즐겨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정돈되는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은 나름의 균형과 기획으로 꾸려져 있다. 솔직히 당신이 어떠한 생각을 하더라도 안주인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공간은 오늘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모습이니까, 그녀는 이 같은 안락함을 당연한 것, 애초에 있던 것, 자신의 모습 그대로라고 여길 것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벽 사이에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조화를 이룬 소품에 둘러싸여, 멋지고 감미롭고 단순하게 빛나는 사물에 둘러싸여 나는 그녀를 만났다.  오늘 보듬이의 여행 주인공은 서울에 사는 이혜진씨다. 갓 마흔을 넘긴 그녀는 오랜 시간 외국에서 지냈다.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하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와 터를 잡은 지는 삼 년을 넘었다. 경복궁을 가운데 두고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북촌과 서촌에는 우리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유의미한 결과물로 보여주는 실험적인 공간들이 몇몇 존재한다. 이혜진씨는 그들과 오래 전부터 교류하며 자신만의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다. 공간은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가장 뚜렷한 흔적은 주인의 기억과 습관, 취향을 망라한 수집이다.  이혜진씨의 영국 유학 시절, 지인이었던 《뉴요커》 잡지 필진들의 아시아 여행 칼럼 진행을 도운 적이 있었다. 그녀는 홍대 인근에서 작업하던 예술인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들은 홍대와 망원동 인근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고 연신 유쾌했던 시간을 감사해 했다. 하지만 결말은 그리 신나지 못했다. 그들은 이렇게 적었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이미 독립했을지는 모르겠으나, 문화적으로는 아직 독립하지 못했다.” 칼럼니스트의 성급한 견해의 산물이었는지 아니면 안내자의 좁은 식견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었든 간에 이혜진씨는 크게 후회했다. 아름다움을 다루고 고민하는 작가라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작가냐 아니냐를 떠나 한국인이라 해서 우리 문화와 정체성을 고민하고 소화시켜 남에게 소개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고민해보지 않고서는 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정말 독립하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이혜진씨의 한국문화 기행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다. 차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일본에서 배워와 한국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씩 그 갈래가 나뉜 현대의 행다법에는 논리와 체계가 부족했다. 깊이 들여다보고 관점을 철학하는 과정이 생략된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이론적인 기본기라 할 수 있는데서 출발한 아쉬움이 정동주선생의 수업으로 그녀를 이끌었는지 모른다.  이혜진씨는 차나 한국문화를 배우면서 전통을 고수한다고 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이를 넘어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형식미가 있어야 하고, 이를 충분할 정도로 납득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인 바탕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와 닿아야 한다. 나는 그녀가 발견한 사물들 사이에서 저 고민의 흔적을 찾았다. 그녀에게 수집이란 취미를 넘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제련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이혜진씨는 일 년에 십 수번도 넘게 일본이나 타지로 출장을 간다. 어느 골목, 어느 빌딩숲을 가리지 않고 마치 민들레 씨앗처럼 이곳저곳을 훑는다. 그러다 발견하는 예쁜 소품은 기억하되 곧바로 구입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 보다는 이미 잊혀졌거나 잊혀지길 기다리는 중이거나 반대로 잊혀져서는 안 될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조건에 맞는다고 해서 또 곧바로 손대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녀는 갖고 있던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 마음 씀씀이를 본다. 타인이지만 잠깐이라도 그녀와 마음을 둘 여유가 없는 사람의 물건이라면 아무리 눈길이 가 닿아도 선뜻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내지 않는다. 갖가지 모양의 감정의 끈들이 그녀와 사물들 사이에 묶여 있다. 그렇게 이혜진씨는 외할머니가 기억하는 시대의 물건부터 조선 시대와 에도 시대의 어느 추억과 저 머나먼 바다 건너 살던 사람들의 습관들을 자신의 몸에 한데 묶어 놓았다.   누구나 사물을 보고 있다고는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직접 보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은 이론서로부터, 유래로부터, 계통으로부터, 기술적인 수법 같은 외적인 요소들을 본다. 나는 언제나 사물은 전체적으로 직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식은 수집의 중요한 요소지만  수집이 단순한 모으기의 즐거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좋은 관점을 얻기 위해 직관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누구나 타인의 좋은 관점을 빌리는 편이 좋다. 그렇게 하면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된 가치에 대한 투자이고 충분히 거기에서 멋진 세계를 소유할 수도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를 ‘지키는 수집’이라 불렀다. 이러한 수집은 사회에도 좋은 역할을 한다. 사물의 가치가 더욱 단단해지고 보장받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분수를 알고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는 일이므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올바른 표준에 의존하는 일은 언제나 권할 만 하다.  네 번의 서로 다른 과식의 공간을 넘어서면 그녀의 텅 빈 차실에 이르게 된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완전히 빈 하얀 한지의 공간이다. 차살림을 말하는 우리가 언제나 빈 공간의 차실의 중요성을 설명하지만 실체화 된 공간은 바로 이혜진씨 안에 있었다. 완전한 과식 끝에 찾아온 완전한 텅 빔이다. 아무도 시도한 적 없는 차실이라 의미 있지만 이혜진씨의 공간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그녀는 수집을 통해 관점을 세우고 결국 ‘지키는 수집’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 수집은 관점의 집합이고 소산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물이 존재하므로 선택했다기 보다는 선택했기 때문에 사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수많은 관점을 연습하고 개발하며 이룩하는 수집의 길 끝에는 반드시 조그마한 자기만의 세상이 열린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창작이다.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수집은 한낱 개인의 취미가 아니라 공공의 일이 될 것이다. 개인의 수집이 우리가 모르던 작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을 모두에게 선물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보듬이를 바라보며 :   "저는 아무런 다른 번거로움, 도구의 얽매임 없이도 차 한 잔 마실 수 있다는 놀라움을 보듬이를 통해서 배우고 있어요. 공간을 가득 매운 소품들 사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생각을 해 가끔씩 웃곤 한답니다."  








글과 사진_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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