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새로운 여행 : 차를 만끽하다 03
새벽, 홀로 만끽하다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뜬다. 늘 그렇다. 잠이 덜 깬 몸을 추스르며 차실로 향한다. 커튼을 걷으면 새벽하늘이 펼친다. 아침노을이 은은하다. 그 아래 늠름한 금오산은 검푸르고, 저만치 저수지에는 연잎이 반짝거린다. 우수 무렵만 해도 창 너머는 캄캄하다. 다만 옅은 빛 아래에 웅크린 산이 있고 저수지 얼음은 녹기 시작한다는 걸 안다. 늘 그런 듯해도 하루하루 다른 하늘과 들판을 병풍 삼아 찻자리에 앉는다. 올해 일흔을 훌쩍 넘긴 김찬한 씨의 아침 맞는 풍경이다.
십 년째다. 김찬한 씨는 찻자리를 펴는 것으로 하루를 연다. 찻잎을 우림이에 넣는다.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린 후 식힘이에 따른다. 보듬이에 노랗게 익은 동장윤다를 담아 향을 맡는다. 그저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하는 편이 맞을까. 한 모금 머금었다가 삼키고, 다시 물을 따른다. 오롯이 앉아, 물소리, 마음을 깨우는 차향, 손에 보듬은 찻그릇의 온기를 느낀다. 그저 차를 우리고, 마시는 데 온 마음을 쏟는다. 마실수록 몸에 온기가 돈다. 때때로 마음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아 사라진 듯하다. 문득 몸도 마음도 가뿐히 깨어난다. 그러고 나면 맑은 머릿속에 그날 일과가 차근차근 정리된다. 깜빡 잊었던 일도 떠오르고, 답이 막막하던 일에 실마리가 보이기도 한다. 남은 하루는 찻자리를 마무리하며 정리한 생각과 계획을 차근차근 행동으로 옮기면 그만이다.
그는 긴 세월 기업을 경영하며 많은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왔다. 비즈니스에 관한 무수한 책이 있지만, 그 어떤 권유보다 아내가 이끌어준 동장윤다와 함께 하는 아침 찻자리가 잘 맞았다. 선택하고 결정하기 위해 시사·경제 뉴스를 챙겨보고 더 많은 정보를 찾아 읽는 대신, 찻자리에 앉아 차를 마신다. 차를 음미하는 동안 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비운다. 이제는 하루를 여는 습관이 되었고, 비우고 잠시 멈추는 시간은 하루를 더 풍성하게 채우는 힘이 된다.
한낮, 어우러져 나누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5t들이 트럭의 뒷문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잘 잠겼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트럭 안에는 수백 명의 식구들이 수년 간 먹을 장이 들어 있다. 이 트럭은 곧 작별할 회사에 도착할 것이다.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직원들이 몇 년은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사 식구들의 점심을 손수 챙겨왔다.
경영자의 아내인 권경희 씨는 여느 사업가의 안주인이 골프장이나 모임 등에서 위세를 쌓고 넓힐 때, 매일 점심 식단에 필요한 먹을거리를 장보고, 철마다 밥상을 맛깔스레 꾸며줄 계절 먹거리를 빼놓지 않았다. 해마다 회사 식당 사람들과 함께 김장을 하고, 된장과 고추장, 간장을 담았다.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언제든 마실 수 있게끔 차 도구와 차를 넉넉히 채워두었다. 바쁜 점심 식사 준비를 마치면 함께 한 직원들과 나무 그늘에 앉아 차 한 잔씩 나누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경희 씨는 좋은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이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한 끼 식사의 든든함이 하루를 당당하고 힘차게 만든다. 잠시 쉬는 시간에 좋은 차 한 잔으로 활력을 얻는다. 그 믿음으로, 그는 회사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나누는 봉사도 한다. 소록도 집마다 매년 일 년 치 장과 김치 등을 선물하는 일도 꽤 오래 해 온 일이다. 정직하게 농사지은 농부의 작물을 해마다 넉넉히 사들여 이웃에게 선물한다. 흉년이 들면 품질을 따지지 않고 밭째로 구입해주기도 한다. 마치 예술가를 지원하는 메세나처럼, 콩, 배추, 무, 각종 곡식과 버섯 등등의 건강한 먹거리를 응원해 왔다. 결은 다르지만 인간에게 근본적인 차원의 후원자인 셈이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복이고 자신을 넉넉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스승은 차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식 중 하나라고 가르치셨다. 차살림은 먹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이끈다고 일러 주었다. 권경희 씨는 이 가르침들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커도, 건강한 몸과 마음, 그 위에 반듯이 일궈진 삶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삶으로 이끄는 길눈이는 될 수 있으리라. 남편을 위해 아늑한 찻자리를 마련해준다.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고 마실 수 있게끔 회사 휴게실에도 찻자리를 준비해둔다. 나머지는 남편의 몫이고, 직원들의 몫일 뿐이다. 차는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다만 나를 위한 것이 반드시 내 몸의 건강이나 차 마시는 순간의 즐거움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평행 권경희의 차살림이고, 차를 대하는 태도다.
서로의 길눈이가 되어
2020년 여름의 어느 오후, 모든 것이 뜨겁고, 어수선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시간에 부부는 차실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신다. 장마가 지루하게 설치고 간 뒤에는 태풍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차실 창밖으로 보이는 산마루가 호수 위로 선명히 비치는 날이다. 연꽃은 지고 잎이 무성하다. 남편은 손수 보듬이에 차를 담아 아내에게 건넨다. 남편은 보듬이를 건내다 아내의 가슬가슬한 손끝을 느낀다. 순간 따스한 기운이 돈다. 차의 따듯함 때문인지 아내의 손끝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가슬가슬함이 말해주는 지난 세월 때문인지는 모른다. 두 사람은 한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보듬이를 입술에 갖다 댄다.
몇 년 전 지인이 김찬한 씨에게 기업 인수에 관한 생각을 물었다. IMF 시절 퇴직 후 창업해, 아내와 함께 이십 년이 넘게 꾸려온 회사였다. 회사는 차근차근 견실히 성장했다. 최근 몇 년은 최고 실적을 연이어 갱신했다. 매해 김찬한 씨는 직원들에게 상여금과 보너스를 아끼지 않았다. 벌어들인 만큼 나누었다. 그에게 회사는 그저 돈을 벌고 재산을 늘리는 도구가 아니었다. 뿌리고 거두고 나누는 삶의 한 부분이었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면 언제 어떻게 떠나는 것이 좋을까. 찻자리에서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아내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넘겨줍시다.” 우리는 부족함 없이 잘 살아왔으니 이제는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때가 되었노라고. 남편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아내에게 고마웠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회사를 넘길 만한 새 주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 함께 해 온 회사 식구들의 고용을 전원 승계해 줄 사람이어야 했다. 그들은 값비싼 물건을 더 비싼 값에 팔아 치울 생각이 없었다. 오 년의 시간이 걸렸다.
사업을 정리하면서 부부는 지난 이십여 년을 마무리했다. 동시에 이후의 삶을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부는 자기 마음을 잘 돌보며 살기를 꿈꾼다. 욕심은 욕심을 부르기 마련이라, 거듭 내려놓고 비우려 애쓴다. 긴 세월 곁을 지키며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만큼이나 마음의 결도 닮은 부부는 이제 좀 더 자주 함께 차를 마신다.
근사한 찻집에 차려입고 앉아 주문한 차를 기다리는 일도 좋지만, 취향이 흠뻑 묻은 내 집 차실에 앉아 남편이 내려주는 차를 마시는 찻자리가 더 기껍다. 이제 막 접어드는 노년의 삶에서 다다르고자 하는 두 사람의 꿈은 같다. 그래도 삶은 삶인지라 잔잔히 망설일 일은 또 생길 것이다. 그럴 땐 찻자리를 펼치고 또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여태 그랬듯, 그렇게 서로에게 길눈이가 되고 도반이 되어 주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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