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새로운 여행 : 차를 만끽하다 02
하얀 무명천이 반으로 접혀 바닥에 놓여 있다. 가슬가슬한 종이로 바른 바닥은 빛을 머금고 있다가 하얀 천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뜨린다. 접힌 가장자리 선을 따라 손가락이 가로로 슬며시 흐르고 이내 모서리에 멈춘다. 천 귀퉁이를 살짝 잡아 앞으로 던진다. 접혀 있던 절반의 하얀 배경이 파도가 되어 일렁이며 앞으로 쏟아져 내린다. 펼친 자릿수건 가장자리에 닦음수건 한 장을 두 번 접어 올린다. 자릿수건 앞에는 앞수건을 놓는다.자릿수건 위에 보듬이가 놓인다. 은 탕관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고, 동장윤다가 닦음수건 옆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기물과 사람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이제 찻자리는 준비되었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눈이 닿는 모든 곳에서 떠다니는 공기까지 이곳은 주인을 닮았다. 평비 최보금은 차살림을 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차살림을 바느질하는 사람이며, 이 공간, 빛꾸리의 주인이다.
차살림에 쓰는 차수건 세 가지와 찻그릇 싸개는 모두 최보금 작가의 손에서 태어났다. 자릿수건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품 한 께, 저 위에서 여기 아래까지 한 자, 두께는 반 푼을 조금 넘는데 가장자리는 조금 도톰하게 한 푼이다. 광택은 없되 아예 없어서는 안 되고, 주름은 편평하되 도드라지면 안 된다. 가슬가슬하되 보드라워야 한다. 나풀거리지 않게 힘이 있되, 뻣뻣하거나 반대로 한들거려 끌려 움직이거나 해서는 안 된다. 닦음수건은 그보다 조금 투박한 듯한데, 손에 쥐고 찻그릇을 닦아내기에 알맞다. 거듭 접거나 펼쳐도 쉬이 구김이 가지 않고 물을 머금는 힘도 좋다. 앞수건은 남자 어른 한 뼘의 가로 길이에, 여자아이 한 뼘의 세로 길이로 은근한 광택이 부드럽고 힘이 있다. 손님께 내놓는 차 한 잔이 놓이는 자리답다. 세 가지 차수건은 언뜻 모두 하얗고 장식 없는 네모꼴이지만, 찬찬히 보고 만지면 미묘하게 색도 질감도 모양도 다르다.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만든 이는 쓰임새를 살펴 저마다 제 역할을 한껏 다 할 수 있게 했다.
우림이와 식힘이, 보듬이를 담는 싸개도 그렇다. 수년 전 구르다팀은 차살림 퍼포먼스를 위해 유럽으로 여행을 갔었다. 한 달의 긴 여행에서 기물들을 보호해 줄 싸개가 필요했다. 평비 선생은 촉박한 기간에 밤잠을 설쳐가며 작품을 만들어 주었다. 이곳저곳 떠도는 동안, 보자기처럼 묶고 풀고 하는 과정의 번거로움을 피하되 찻자리의 멋을 잃지 않게끔 단정한 싸개를 고안해내었다. 도톰한 천 안팎으로 수천 번의 침공(針工)이 녹아 있다. 안팎으로 뒤집어 보아도 꼼꼼한 바늘땀이며 매무새가 한결같다. 시침과 본봉이 정교하게 짜여 있어 십 년을 써도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 무심한 듯 보이는 선과 면 안에 숨겨둔 것은 작가의 깊은 헤아림이다. 쓰임을 두루 살펴 부족함이 없게 하되, 쓰임 없이 겉치레는 하지 않으니 정갈하다.
최보금 작가의 바느질은 주인의 품새를 닮았다. 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에 코바늘을 꿰고 손바느질하는 법을 어깨너머로 보고 익혔다. 타고 난 셈인데, 그저 능숙한 것에서 한 발 나아가 곱고 단정하게 작품을 완성하는 재능은 어머니께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분이셨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지만, 반짇고리 앞에 앉아 누빌 선을 따라 바늘땀을 떠 넣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친다.
비단 그의 바느질이 타고난 솜씨로 비롯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절 다니기를 좋아했는데 마음 두고 존경을 쏟을 스승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가까운 이들의 요청으로 바느질 강좌를 한창 이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 스님이 바느질 작품을 부탁하셨다. 그는 작품이 놓일 곳, 쓰일 몫을 두루 살피는 터라 몇 차례 스님 계신 절을 다녀와야 했다. 그러다 한순간 마음이 멀어졌다. 존경의 대상이 부재한 탓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진심으로 수행하는 스승이 있어야 할 절에는 모진 사람 인연만 있었다. 의뢰받은 작업이 끝나자마자 발길을 돌려 다시는 그 절을 찾지 않았다. 그는 다만 바른 것을 좋아하고 가까이하고자 할 뿐이다. 지켜야 할 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반듯하게 한 땀 한 땀 손바느질을 해나가는 일과 닮았다. 올바른 마음가짐과 단정한 아름다움은 결이 같다.
작가의 이러한 성품과 기질은 차살림을 만나면서 견고해졌다. 평비 선생에게 바느질을 배우러 온 평락 선생을 통해 평단 선생을 만났고, 평단 선생의 권유로 대구국립박물관에서 있던 정동주 선생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은 바느질 수업이 많아 유독 바빴다. 그는 잠시 정동주 선생의 강의를 쉬면서 자신의 수업을 하나씩 마무리 지었다. 제아무리 좋은 강의를 들을 기회가 생겨도 내가 가르칠 자리가 생기면 그 일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만큼 꼭 맞는 실과 바늘 같은 것이었을까. 그해 가을 최보금 씨는 자신의 모든 수업을 정리하고 정동주 선생의 차문화 강의의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매일 스승의 가르침대로 차를 마시고, 역사를 배우고, 차살림법을 손에 익혔다.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는 동안 그의 노력은 점차 습관이 되었다. 가족들은 새벽에 일어나 차를 마시는 일을 엄마 혹은 아내의 당연한 일과로 여겼다. 그즈음 변화가 찾아왔다. 찻물이 하얀 자릿수건에 스며들듯 남편과 아들도 자연스레 보듬이를 쥐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 부처님은 여전히 마음속에 계시고, 의지하는 스승은 십 년 동안 매번 같은 말씀을 하신다. 차를 바르게 살아가는 마음의 길잡이로 삼으라. 가만히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며 차를 마시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약속이다. 차를 가까이할수록 육체가 깨어나고, 가족이 둘러앉아 나누는 대화에 온기가 더해갔다. 그렇게 마시는 차는 최보금 씨에게 확신을 불어 넣었고, 삶의 모양새가 점점 반듯하게 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평비라는 자신의 호(號)를 아군 삼아 차와 차살림의 힘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빛꾸리가 태어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게 차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아끼고 신뢰하는 것이었다. 차살림법에 따라 차를 우리고 마시는 일이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잘 구현하기 위해서 빛꾸리는 많은 손이 필요했다. 차살림 수건은 모두 한 땀 한 땀 손수 지었다. 차살림에 필요한 도자기 찻그릇도 모두 제 몫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들의 작품으로만 골랐다.
잘 지어진 한옥 서까래 아래로 흰 벽과 은은하게 퍼지는 노란 바닥의 빛깔이 차분하다. 하얀 자릿수건 위로 펼쳐진 서로 다른 작가들의 우림이, 식힘이, 보듬이가 어우러진다. 은 탕관의 물이 끓으면 한 자 떠서 식힘이에 붓는다. 찻잎을 우림이에 담고, 식힌 물을 부어 우려낸다. 평비라는 이름으로 십 년을 한결같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마셨듯, 정성을 다해 차를 우리고 보듬이 담아 손님에게 대접한다. 특별한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차를 우리고 마시는 그 시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내가 그러했듯, 그 경험이 작게는 일상의 위안이 되고 크게는 삶을 꾸리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빛꾸리에 가면 마당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스승은 스무 해가 넘게 손수 키우고 가꿔온 소나무를 빛꾸리 열리는 날 선물하셨다. 큰 결심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빛꾸리 어디서나 보이는 소나무는 스승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에는 위로가 되고 몸과 마음이 나태해지는 날에는 다시 북돋울 힘이 된다. 차살림을 주재하는 이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손님이 앉을 방석을 손수 다리고, 차수건을 반듯이 개어놓는다. 차에 곁들이는 과자와 떡을 일일이 빚어 굽고, 흙 마당은 정갈히 비질한다. 왜 마당에 콘크리트를 바르지 않고, 저렴하고 깔끔한 세트 그릇을 손님상에 내지 않는지, 쉬이 더러워질 흰 수건을 번거롭게 찻자리 마다 내는지 묻지 말라. 이곳은 차를 마시는 곳이다. 차를 만끽할 줄 아는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다. 빛꾸리의 주인은 보듬이 가득 차를 담아 당신 손에 쥐여주고픈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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