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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안과 밖




보듬이의 새로운 여행 : 차를 만끽하다 01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작은 돌멩이들로 수놓은 바닥을 몇 걸음 걷는다. 허리춤 오는 관목 몇 그루와 발 언저리께 오는 풀꽃들이 길게 늘어선 듯 피어있다. 이리로 들어오면 된다고 말한다.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로 반짝이는 마당이 펼쳐진다. 구석구석 손길 닿지 않은 데 없는 꽉 찬 정원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초여름 볕이 깃들기 시작한 들판의 한 자락 같다. 느티나무와 사람 키만 한 관목, 덤불과 화초, 들풀과 키워 먹는 작물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쪼개 화분으로 삼고, 밭작물은 나무 그늘 사이로 자란다. 좁다란 무논과 감나무 그늘, 느린 박자 음악처럼 드리워지는 언덕 능선을 병풍 삼아 들어앉은 이곳은 차인의 정원이며 엄마의 뜰이다.


풍경의 점처럼 나지막하게 앉은 집으로 들어선다. 뜰로 들어설 때처럼 좁다란 복도를 지나면 천정이 높고 앞이 탁 트인 공간이 나온다. 세로로 긴 선들 사이로 깊고 넓게 가로지르는 가로선들. 그 중간중간 자리 잡은 원형의 점들. 공간의 단순한 선과 색이 그 자체로 느긋하게 어우러져 눈길을 붙잡는다. 대신 여느 집 거실에 있을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TV, 소파, 장식장 없는 이곳에서 가족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 있어야 할 것만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있어야 할 것이 없어도 괜찮다고 해야 할까.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평락(平樂) 임지희 씨가 삶을 선택하고 다루는 방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앞뜰에 핀 풀꽃에 관해 물었다. 나무 그늘 밑, 볕 바른 담 가, 뜰 곳곳에 자라는 풀꽃은 다 다르다. 저마다 개성이 강해 손도 여러 번 갈 수밖에 없다. 같은 성질과 모양의 것으로 집합을 만들거나 하다못해 교집합이라도 만들면 좋으련만 그녀는 굳이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을 택했다. 그녀는 마주 앉은 의자를 앞으로 살짝 당겨 찻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임지희 씨가 풀꽃을 마당에 들여와 가꾸기 시작한 지는 오 년쯤 되었다. 처음에는 섭리를 몰라 당황하기 일쑤였다. 풀꽃은 계절이 바뀌며 그 흔적을 점차 지워나간다. 한창 빳빳하게 들었던 고개가 꺾이기 시작하고, 겨울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무는 잎이 져도 가지는 남아 한겨울에도 존재감을 상기시켜주지만, 풀꽃은 달랐다. 이들은 겨우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봄이 점점 가까울수록 조바심이 인다. 흙을 뒤적여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야 만다. 죽은 줄 알고 낙심하지만, 어느새 싹이 튼다. 때가 되면 빈 땅처럼 보이는 죽음의 장막을 뚫고 밖으로 고개를 밀어 올리는 풀꽃의 한해살이는 큰 울림을 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 쉬이 알기 어렵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자연의 이치를 책이 아니라 풀꽃과의 숨바꼭질을 통해 느낀 셈이다. 그녀는 자신을 게으른 사람이라 말한다. 이 깨달음의 과정이 게으르고 무뎌지기 쉬운 일상을 경계하게 하는 힘이 된다.


임지희 씨는 풀꽃 이야기의 언저리에서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차를 배우고 차살림을 매일 하면서 얻은 결과인 거 알아요?” 풀꽃을 가꾸며 새삼 깨닫는 생과 사의 진실의 바탕에는 차살림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꽃을 다루는 사람이기 이전에 차인이었다. 차살림은 매일 차를 마시고, 습관으로 삼고, 그 시간을 빌어 오늘의 나를 돌아보라고 권한다. 내가 오늘 했던 말, 내가 만났던 사람과의 이야기, 그때 느꼈던 희로애락은 어디서 비롯했는지, 앞으로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묻고 답하는 시간과 자리가 찻자리다. 그곳에서 털어놓는 마음의 이야기는 모두 나라는 실체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차살림 하는 차인이고, 임지희 씨는 십 년에 걸쳐 매일 차를 마시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았다.



그녀는 거듭 보듬이에 차를 담아낸다. 호흡은 길고 차분했으며, 말하는 흐름과 빈 보듬이에 차를 채우는 일이 서로 어색할 틈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오십 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청도에 내려오기 전, 삼십 대의 임지희 씨는 고민이 많았다. 경력을 쌓고 결단력 있는 삶을 살았지만, 삶의 구석구석에 언제나 물음표가 가득했다. 자신의 결정이 딸들에게 예기치 않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불편함이 하나둘씩 쌓이면서 고민의 무게는 어깨를 짓눌렀다. 서울을 떠나 청도로 이사했지만, 시골의 삶은 그녀가 꿈꾸던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약간의 도피였을까. 다만 가족이 모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지루함과 나태함, 고립감이 정신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게 되었을 즈음, 차를 만났다. 청도에서 차를 가르치던 평단 선생을 만났고, 영민한 그녀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본 평단 선생은 그녀에게 다른 공부 한 가지를 권했다. 정동주 선생과 차살림과의 만남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어떤 선택을 해야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고, 어디까지 자유로워야 옳은 걸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해야 이 빈 곳을 채울 수 있을까. 임지희 씨는 정동주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슴에 촉촉하게 스며드는 선생과의 차 공부에 삶의 질문들을 하나씩 녹이는 연습을 했다. 매일 찻자리를 가지고, 매일 삶의 인과관계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선생은 답을 던져주지 않았다. 차살림 안에 답이 있다고만 했다. 몇 번의 고비,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해하고, 익히고, 손에 익숙해지고,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었을 때, 답은 슬며시 곁으로 찾아왔다.


남편이 아침 찻자리에 앉아 손수 차를 우려 자신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어느 주말 오후엔 딸들이 먼저 다가와 엄마에게 차를 마시자며 졸랐다. 엄마는 세상에서 더 가치 있는 것과 덜한 것,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 계절처럼 모습을 바꾸지만, 사실은 한결같은 자연의 이치에 관해 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단단해진 엄마의 한마디는 궁금한 것이 많은 딸이 두려움 없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되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가 없고, 엄마는 늘 확신을 주었다. 아이를 가져본 적 없어도 우리는 모두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안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아이였고, 삶이 두려운 소녀였고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임지희 씨는 平樂, 스승이 주신 새 이름과 안팎이 두루 닮은 사람이 되었다. 결국 모든 답은 이미 자기 안에 있었다. 차살림은 그녀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매일의 차살림은 그녀에게 알맞은 온도였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토양과 햇볕 삼아 차수건을 펼치고 차를 우리고 찻자리 너머 무형의 무언가를 보고자 애쓴 시간이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작은 풀꽃에서 큰 세상의 이치를 들여다본다. 이 아이는 왜 이때 피어야만 했는지. 저 아이는 왜 더 기다려주어야 하는지. 붙잡고 흔들 필요 없이 삶이란 제각각의 깜냥을 각각의 농도로 품고 보듬어주면 된다는 사실을 손끝으로 깨달았다.



찻자리를 접고 정원으로 나간다. 이 꽃은 이름이 무엇인지, 언제 피는지, 왜 심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며 먼저 묻지 않는다. 아끼고 공을 들인 아이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나서서 소개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바람을 느끼고 길어지는 나무 그림자도 보며 짧은 산책을 한다. 무리해서 꾸미지 않는 것. 간결해서 아름다운 것. 안팎이 다르지 않아 자연스러운 것에 관해 생각한다. 삶에 답을 찾아 절실히 묻고, 매일 몸으로 익히고 시간을 들여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 그렇게 차인이 되고, 훌륭한 부모가 되고, 홀가분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뜰에서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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