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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듬이에 담고 싶은 것


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38장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제11번 곡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나는 형형색색 핀 꽃의 꿈을 꾸었다

마치 5월에 활짝 피는 것처럼

푸른 들의 꿈을 꾸었다

즐겁게 새가 노래하는 꿈을


그러다가 닭이 울자

난 눈을 떴다

춥고 어두웠으며

지붕에서는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그런데 창문 유리 위에

누가 잎새를 그려 놓았을까

너희는 몽상가를 비웃고 있는가

겨울에 꽃을 봤다는 그를


난 사랑의 꿈을 꾸었다

한 아름다운 처녀의 꿈을

포옹과 키스의 꿈을

기쁨과 행복의 꿈을


그리고 닭이 다시 울자

내 마음은 잠이 깼다.

이제 나는 여기 홀로 앉아

꿈을 되새겨 본다


두 눈을 다시 감는다

가슴은 아직도 따듯하게 뛰고 있다

너의 잎새는 창에서 언제 다시 푸르러지려나

나는 내 사랑을 언제 안아보려나.”



슈베르트의 마지막 작품 <겨울나그네>는 실연에 가슴이 갈가리 찢어진 한 남자의 정처 없는 산책길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가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가끔 이 곡은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날 어떤 기분을 잘 설명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울적한지, 우중충한지, 진창에 빠져 있는지, 허우적대는지, 헤엄은 치고 있는지, 두 발이 공중에 붕 떠서 유영하는 데 좋기는커녕 기분이 묘하게 나쁜 그런 날도 있다. 좋은 기분도 백 가지의 결이 있고, 나쁜 기분도 천 가지의 얼굴이 있다. 옛날 사람 중에 군자에 가까웠다는 이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래서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한다는데 삶이 처음이라 서툰 우리는 그 말만 기억할 뿐 현실과 요원하다는 생각에 그냥 웃어 넘겨버리곤 한다.


길지 않은 내 삶을 되짚어보면 나는 특히 내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무관심한 인간이었다. 자극에 민감하고 의존적이었던 나는 그 까닭으로 다소 멍청한 선택을 선호했다. 감정을 이해하기보다 다른 감정으로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이 글을 읽는 다수의 당신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상처는 쾌락의 자극으로 덮고, 이별은 다른 만남으로 감추지 않았나. 친구를 만나 씹고 뜯고, 마시고 피워대는 그 모든 일 뒤에 찾아오는 허무는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고통이나 슬픔 그 자체는 불필요한 일로 치부하며 살았다. 아니라고 당당하게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자 나에게 돌을 던져라.



차를 좋아하게 되고, 공부하고, 강의하면서 좋아하게 된 구절이 있다. 초의가 한 말 중에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


이에 대해 김훈이 한 말이 생각난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책과 술과 차가 다 좋은데 각각의 역할이 있으니, 그중 차는 고독해야만 알 수 있는 것에 관한 서사가 아닐까 싶다. 몇 명이 마시는 차가 가장 좋은 차인가에 관한 논쟁을 꽤 오래된 것인데, 명나라 말기 장원은 <다록>에서 예닐곱 이상이서 마시는 차를 ‘시(施)’라고 했다. 시란 베푼다는 뜻이다. 베푼다는 것은 좋은 뜻처럼 보이지만 차와 관련해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나눔이고, 나쁘게 말하면 베푸느라 자기는 챙기지 못하는 푼수 짓에 가깝다. 웃고 떠들고, 공감해 주고, 챙겨주느라 힘과 재물을 쓰고 결국 차에서 챙길 것은 챙기지 못하니 ‘施’란 베풀고 나누는 일이되, 지극히 개인 차원에서 보면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느라 애쓰는 헛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나면 아드레날린은 조금 분비될지 몰라도 챙겼어야 할 내 안의 문제를 챙겨보지도, 응시하지도 못한 채 그저 미루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며칠 지나고 나면 결국 다른 감정으로 자연스레 덮어두게 된다. 어릴 적에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나쁜 짓이다.


대학 생활 하며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 하나에서 프로이트는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대체하거나 전치(轉置, displacement)하려 하지 말라고 했다. 나의 누이는 내가 애정전선의 한복판에서 패전하며 눈물의 후퇴를 할 때 이렇게 위로했다. “다인아, 슬픔을 슬픔으로 충분히 받아들이렴. 무엇이든 그다음에 하렴.” 이십 대 후반의 어느 겨울, 나는 슬픔의 정체를 밝히고자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야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내가 저 <겨울나그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결국 누이의 저 말이 아닐까 싶다.



한 개의 그릇에는 한 가지 액체만 담을 수 있다. 물을 담았다면 물그릇이고, 술을 담았다면 술잔이다. 차를 담았으니 찻그릇이다. 같은 그릇에 물과 차와 술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해봤는데 결과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저 먼 옛날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그 그릇에 문양을 그리고 새겨 넣으며 삶을 관조하고, 인생을 노래했다. 그릇 하나에 무늬 하나. 그리고 그 그릇에 담는 무언가 딱 하나.


보듬이는 쩨쩨하고 거만하게 한 손으로 쥐지 않는다. 굽이 없으니 나를 애써 낮추거나 높게 보지도 않아 편안하다. 담기는 물건의 온도를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따듯하면 따듯한 대로,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낀다. 새긴 무늬의 결을 손바닥과 손끝으로 느낄 수도 있고, 퍼지는 액체의 향도 이미 지나간 자리의 향취도 오래도록 느낀다. 그러니 보듬이 안에 담긴 물건은 있는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자세히,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나도 해봤으니, 당신이라고 어렵겠는가.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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