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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듬이를 보듬어서


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30장













‘보듬이’라는 말은 ‘보듬다’라는 동사에 사람이나 사물을 뜻하는 말인 ‘이’를 붙여 새롭게 만든 새말이다. 보듬이는 말 그대로 두 손으로 보듬는 찻그릇을 상상하며 만든 단어다. 이희승이 쓴 1982년 판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보듬다’는 ‘두 팔로 끼어 가슴에 붙이다, 포옹하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손과 몸으로 바로 받다, 남의 일을 책임지고 맡다, 새나 닭 따위가 알을 품다, 생각으로서 지니다’는 뜻을 지닌 ‘안:다’는 말의 사투리다. 그렇고 놓고 보면 보듬이는 나의 밖에서 나의 안으로 들어오는 무언가를 의심이나 경계로 쳐내지 않고 몸소 받아내는 몸과 마음의 일체감을 떠오르게 한다. 보듬는다는 것은 격정과도 같은 뜨거운 포옹이 아니며, 그렇다고 데면데면하고 마는 품성의 일도 아니다. 두 팔을 벌리고 쓸어 안는 것이며,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피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기꺼이 머뭇거림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니 보듬이는 두 손으로 감싸 쥐듯 들어야 하며, 우리는 이 그릇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무슨 의무감이나 마지못해하는 부담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롯이 차 앞에 솔직한 청정한 마음으로 앉기를 바란다.



보살(菩薩, bodhi-sattra)은 본래 초기 불교에서 현겁의 두 부처인 석가모니불과 미륵불 다음에 찾아올 부처 후보를 뜻했다. 보살은 반드시 스스로 법을 성취해야 한다는 조건에 따라 현생의 부처의 법문을 듣거나 가르침에 귀의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뜻과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게 보살계에 들어가게 되면 다음 시대의 부처가 될 후보 자격을 얻게 되지만 오랜 세월을 선행과 덕업을 쌓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존재이기도 했다. 석가모니의 전생에 호명보살로 지냈던 시간이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렇게 홀로 외로이 수백,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보내며 삶과 죽음을 보살피고, 헤아리는 존재가 보살이었다.


불교가 중국으로 유입되며 보살의 개념이 바뀌었다. 중국 불교는 초기 불교가 개인의 성취와 깨달음에 두었던 초점을 보다 집단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보살의 두 번째 개념이 등장했다. 보살은 이제 성불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었으나,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고, 미래불인 미륵이 출현할 때까지의 사이에 놓인 불쌍한 우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상에 머물며 중생 구제와 헌신하시는 거룩한 분이 되었다. 아주 거대한 시각에서 보자면 전자와 후자가 반드시 교집합일 필요도, 절대로 교집합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주 미천하고 미개하며 작은 나라는 존재의 관점에서 놓고 보자면 앞의 보살은 불가해의 영역에서 헌신하시는 분이며, 뒤의 보살은 나의 인생을 직접 어루만져 주는 분이니 마음이 후자에 조금 더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보살을 생각하며 엎드려 숙인 고개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바쳐 올린다. 보듬이를 쥐는 우리의 손 모양이 바로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찻자리에서 보듬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당연한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따져보면 그리 쉽게 답할 문제가 아니다. 공식처럼 딱 맞아떨어지면 좋겠지만 우리가 당면하는 과제들은 수많은 원인의 결과다. 으레 사람들은 한 가지 결과에 대해 한 가지의 원인을 대입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놓은 하나의 결과는 수백, 수천 가지의 원인이 복잡하게 얽힌 까닭이다. 당신의 피부에 난 뾰루지 하나가 어제저녁에 먹은 치킨이나 라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과연 그럴까.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나의 상태를 깨닫고, 나와 관련한 안팎의 문제를 깨닫고, 그 상호작용을 깨닫고, 원리를 깨닫고, 삶을 깨닫게 하는 것이 보살의 일이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유언에서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죽고 사라져도 법은 여전히 살아 등불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두운 길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어 가던 길도 몇 분이 지나면 앞길인지 옆길인지 뒷길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지혜의 등불이 나타나 우리의 길을 인도할 것이라 했으니, 그것이 조사며 성인과 같은 이들이다. 또한 그들이 내릴 인도란 셰르파처럼 함께 걸으며 길을 앞장서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위치와 방향을 깨닫게 해주는 일에 그칠 뿐이다.


우리는 다소 착각하는 바가 없지 않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인이, 위대한 지식인이, 훌륭한 스승이, 유명한 강연자가 당신의 멱살을 잡아끌고 깨달음의 길로 앞장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지. 그들의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강연을 듣고, 법문을 들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신지. 그들은 그저 길을 잃고 방향이 헷갈리는 당신에게 현재 위치를 좌표로 찍어 보여주고 가고자 하는 방향을 동서남북 화살표로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결국 해내야 할 사람은 당신이고, 해낼 수 있는 존재도 당신뿐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해낼 힘을 얻겠는가. 당신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면 가능한 일일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를 자각하고, 위치를 자각하고, 현실을 이해하고, 가능성을 신뢰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만큼, 나를 존재하게 하는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내 가능성의 절반은 남인 셈이니 우리는 사랑을 멈추어 서도 안된다. 보듬이는 그것을 위한 도구이고, 그것을 위한 자리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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