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선원청규 차법의 미학 02
보리달마에서 비롯된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禪宗)에서는 가고 오고 앉고 눕는 일상에서 꼭 필요한 질문과 대답을 말이나 글자가 아닌 몸짓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썼다. 선(禪)은 마음 깨닫는 수행 방법이다. 마음을 언어나 문자로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마음 찾아가는 여행에서 언어나 문자는 필수품이 아니다. 이런 몸짓 형태 만드는 것을 작법(作法, Karman)이라 했는데, 이 작법 중 하나가 문신이다.
문신의 본디 뜻은 스승이나 윗사람께 몸을 굽혀 문안 인사 올리는 것이었는데, 뒷날에 서로 합장하고 고개 숙여 절하는 예법으로 변했다. 문신은 『대지도론』, 『증아함경』, 『법화경』 등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장회해 선사는 이 문신을 『다례(茶禮)』의 중요한 동작 중 하나로 응용했다.
백장 선사의 『선원청규』에는 여덟 가지 차법이 나온다. 이 차법에서 손님께 차를 대접하는 시자는 손님과 서로 말없이 몸짓만으로 인사를 나누고 차를 권하고 화답을 한다. 차를 만들고 대접하고 마시는 일련의 절차를 참선 수행 방법의 하나로 여기는 선종에서는 찻자리에서 시자와 손님이 말을 주고받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 대접받는 사람과 대접 하는 사람이 말없이 주고받는 몸짓. 이것이 문신이다. 이후로 문신은 선종 수행법으로 자리 잡는다.
문신(問訊)의 ‘問’은 ‘묻다’, ‘訊’은 ‘아뢰다’는 뜻으로 읽는다. 사실상 두 글자는 같은 뜻이다. 그런 까닭에 옛 중국학자들은 ‘문신’이란 말이 억지스럽다고 했다. 이러한 평가는 문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백장 선사의 차법에서 문신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선종 차법에서 주재자와 손님이 주고받는 몸짓을 가리킨다. 문신을 단지 이러한 몸짓을 가리키는 이름으로만 본다면, 옛 중국학자들의 비판처럼 ‘문신’은 뜻이 같은 글자 두 개를 겹쳐 써서 문법에도 맞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이름 같다.
백장 선사의 차법에서 찻자리 주재자와 손님이 주고받는 문신은 그저 묻고 화답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백장 선사는 ‘문신’에 산스크리트어 ‘abhibhasana’와 빨리어 ‘abhivadana’의 의미를 담았다. ‘abhibhasana’는 설법하다, 연설하다, 말한다는 뜻이고, ‘abhivadana’는 깨우치다, 계몽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문신은 주재자가 말없이 “차를 드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일을 되묻는 것이다. 손님이 “차를 잘 마셨습니다”라고 몸으로 감사 인사를 하는 일을 거듭 묻는 것이다. 즉 차를 권하고 차를 마시는 나의 크고 작은 행위, 그 행위의 주체인 ‘나’에 관한 성찰이다.
선종 차법에서 찻자리는 단지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가만히 바라보며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차법에 따라 매 순간 움직이고 반응하는 나의 참모습을 관조하는 수행이다. 마찬가지로 문신은 단지 인사하는 몸짓을 가리킬 뿐 아니라, 차를 권하고 아뢰는 행위의 근원에 대해 되묻는 수행이다. ‘차를 드시겠습니까’하고 아뢰는 일에 관해 묻는 것, 즉 물음에 대한 물음인 셈이다. 물음에 대한 물음을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abhivadana) 설법할(abhibhasana)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찻자리는 “너는 무엇 하러 여기 왔느냐?”라고 치열하되 고요히 묻고 깨닫는 자리이며, 문신은 선종 차법의 정신을 꿰뚫는 행위이자 개념이다. 이러한 문신은 선종 차법을 이어받은 일본 차문화의 핵심 철학이 되었고, 이후 일본인의 생활 예절로 응용되었다. 유교에서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잡아 공경의 뜻을 표현하는 행위인 ‘공수(拱手)’ 역시 선종 차법의 문신에서 비롯되었고, 중국인의 ‘읍(揖)’이라는 인사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지금, 말의 홍수 시대, 문자의 광란 시대에 찻자리에서 나누는 ‘문신’은 정녕 말 없는 말로 인간을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언 땅이 녹고 새 목숨이 눈 뜨는 이 우수 날, 사람 목숨 받아 살아가는 까닭을 말없이 되묻는 차 한 잔을 그대에게 권한다. (문신)
정 동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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