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선원청규 차법의 미학 03
찻자리는 주인과 손님이 함께 이루어내는 또 하나 삶의 공간이다. 주인은 온 정성으로 손님을 섬기고 손님 또한 주인 정성에 걸맞은 예를 다함으로써 생겨난 주옥(珠玉)의 소우주에서 펼쳐지는 삶이 찻자리의 모습이다. 자리 주인과 손님의 삶은 우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오롯이 자신의 노력과 계획의 결과도 아니며, 자신의 소유도 아니어서 자기 뜻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찻자리란 자신의 삶이 우주로부터 끊임없는 도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을 깨닫는 자리다.
자기 안에 사는 양심의 소리와 참된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더욱 생생하게 듣는 데 필요한 고요와 청정이 살이 있는 공간이 찻자리다. 여기서는 주인과 손님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가장 귀한 자리라 믿어 미안함, 후회가 남지 않도록 온 정성으로 차살림을 펴고 손님 또한 지극 정성으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그마한 방석 하나 놓고도 넉넉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작은 방 한 칸 속의 너와 내가 말과 문자를 떠나 완전함을 꿈꾸는 공간이다.
찻자리는 약속 시각을 미덕으로 삼는다. 세상 모든 일에는 시작하고 끝내는 시간이 있다. 시간을 정하고 지키는 것은 모든 관계의 순리다. 만물이 공생하는 지구에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은 곧 수행이다.
정해진 시간은 두 번 거듭되지 않는다.
“바로 이때다. 지금은 다시 오지 않는다. 卽時現金 更無時節”
지나간 시간에 붙들리고 오지 않은 미래를 믿지 말라. 지금 여기서 결정하고 목숨을 걸어라.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하는 일이며, 지금 하는 일이 과거의 얼굴이며, 미래의 종자라는 임제 의현선사의 법문은 찻자리 미학과 삶의 바탕 철학이다.
경칩 날, 다시 만나 새로운 이 날과 그대여, 부디 게으르지 마시기를.
온 마음으로 지금 그대와 함께 있는 이에게 차 한 잔 권하시기를.
정 동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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