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동장윤다 차살림법 01
영하를 밑도는 바깥 날씨로 맞이하는 입춘에는 이름과 의미의 어긋남에 너스레를 떨게 된다. 추위가 언제나 가실까 매일 아침 기온을 확인하는 일이 요새의 일과지만, 알다시피 찬바람은 시간이 지나면 수그러지고 당연하다는 듯이 봄은 찾아온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디까지가 겨울이고 어디부터가 봄인지 누가 좀 정해줬으면 싶긴 하다. 봄의 힘을 빌려 시작하려고 미뤄둔 계획이 있다. 오늘부터라고, 망설이는 마음에 출발선을 그어주면 좋겠다.
입춘은 말 그대로 보자면 설 立자에 봄 春, 봄이 들어섰다는 뜻일 것이다. 들어선다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대개 들어서는 게 나가는 것보다 낫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단어는 중의적이라 상상하기에 좋다. 立자는 두 가지 뜻으로 많이 쓰이는데,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선다는 뜻과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들어선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 입춘은 두 가지 의미를 골고루 담은 것 같다. 길어지기 시작한 해가 땅을 두드리기를 하루 이틀. 어느덧 냉이가 땅 위로 싹을 틔운다. 해의 기운이 땅에 스며들었다. 해가 땅에 들어서고, 땅이 해를 향해 싹을 밀어 올려세운다.
어떤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 첫 문장으로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라고 썼다. 우리는 이보다는 아주 조금 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 쌓인 눈, 언 땅 아래에서 싹은 이미 키를 키우고 있다.
입춘은 추위와 봄볕이 뒤섞인 애매한 날씨같이 어수선한 마음에 갈피를 잡고 출발하기 좋은 절기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 마음에 드는 자리로 가 흰 차수건을 펴 보시라. 자리를 펴는 순간 이야기는 시작된다. 비어 있던 공간에 물소리가, 찻그릇들의 색깔이, 찻잎의 향기가 채워질 테니까. 이것은 어디서부터 무엇으로 시작해야 할지 몰라 어수선하다 못해 얼어붙어 버린 주인공의 마음을 열고, 소설의 첫 문장을 써나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차를 다 마시고 나면, 해야 할 일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결정해야 할 선택도 달라지지 않은 채이지만, 마음에는 차의 온기만큼 여유가 생긴다. 당신이 오늘 몇 번 차를 마시든 내일이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찻자리를 펼치면 된다. 동지에 가장 짧았던 해는 조금씩 더 길고 깊게 땅에 스민다. 그러기를 세 절기째에 이르러야 싹은 돋아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땅 위로 드러난다. 의미를 담아 반복하는 일상의 찻자리는 당신의 어지러운 마음이 단단히 뿌리 내리고 싹을 틔우게 해준다. 머잖아 당신은 비로소 무언가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바로 오늘 미뤄두었던 그 일을 시작하자. 차와 함께.
롤링티
+ 2018년에 카카오스토리에서 시작했던 프로젝트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동장윤다 차살림법>을 다듬고 새 이야기를 이어 짓고 보태어 다시 펼쳐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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