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차 만들기를 갈무리한 지 열흘째.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새벽차를 마십니다. 안은 아슴푸레해도 밖으로는 먼동이 틉니다. 창을 열면 초여름 갓밝이의 선선한 기운이 성큼 들어서네요. 물을 끓이고 차수건을 펼치고 그릇을 꺼내놓습니다. 찻단지를 여니 햇차 향이 피어오릅니다. 차를 한 잔 우리기도 전에 가슴이 살짝 뭉클해집니다.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아 뜨겁게 우린 차를 마십니다. 고요히 차오르는 힘을 음미하며, 지난 곡우부터 입하 무렵까지 일들을 되짚어 봅니다.
하나,
올해는 이른 봄에 비가 잦고 굵어 차나무 잎이 싱거워지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차나무에 새잎이 돋기 시작하는 4월부터는 볕 좋은 날이 많았습니다. 제법 건조하다 싶을 즈음 흩뿌리듯 비가 내려주기도 했고요. 찻잎 따는 시기에도 흔치 않게 비 없이 맑은 날이 이어져 찻잎 수확하기도 좋았습니다. 차나무 잎 수확과 수급이 몹시 어려웠던 작년에 비해, 차나무 잎 품질도 고르고 양도 알맞았습니다.
둘,
동장윤다 제다법은 정동주, 조정연 부부가 이십여 년에 걸쳐 연구, 실험을 거듭해 완성했습니다. 자연 발효와 숙성을 거쳐 동장윤다만의 맛과 향, 약효를 끌어내는 절차는 변함없이 유지하되, 그해 차나무 잎 상태에 맞춰 몇몇 과정에 힘을 덜거나 더합니다. 올해는 예년보다 더 천천히 긴 시간을 들여 발효하고 숙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농부가 딴 차나무 잎 한 장이 동장윤다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을 거치는지 모릅니다. 자그마한 나무 이파리가 차향과 맛을 품고 편안히 잠들 때까지, 밤낮없이 정성을 쏟았습니다.
셋,
올해 동장윤다는 숙성 초기에 화사한 꽃내음이 물씬 피어올랐습니다. 따로 분류해서 제품으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신기하고 매혹적인 향이었으나, 2차 자연 발효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숙성 완료 시점에서 이러한 화사한 향과 들뜬 맛은 첫맛과 중간 맛에 깊숙이 개입하는 고소한 맛과 단맛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동안 중간맛이 채 다 차오르지 않아 조바심이 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효도가 적정선에 이르자 쌉싸름한 맛과 감칠맛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숙성 초기에 분명히 색을 드러내지 않아 궁금하게 만들었던 맛들도 모두 제자리를 찾아 중간맛 층으로 견고해졌습니다.
포장까지 마친 2021년 동장윤다는 고소한 맛, 단맛, 쌉싸름한 맛과 감칠맛이 사이좋게 어우러졌습니다. 밀봉 포장이 된 상태에서도 동장윤다는 아주아주 천천히 숙성되어 가는데, 시간이 지나고 해를 묵힐수록 동장윤다 맛도 조금씩 변화하지요. 제대로 묵은 차일수록 감칠맛이 더합니다. 올해 동장윤다는 여느 해보다 더 빠르고 높은 수준으로 몸을 덥혀준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덧,
동장윤다를 즐기는 방식은 개개인의 취향과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동장윤다는 물의 미세광물질 농도와 범위, 종류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매우 예민한 차입니다. 우려내는 시간과 빈도, 들어가는 찻잎의 양, 다루는 도구의 재질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여름에는 백자, 겨울에는 무유’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그저 농담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제시하는 기본적인 지침은 차와 함께 간단한 안내지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상 지점도 알려드리면 동장윤다를 즐기기 위한 각자의 기준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장윤다는 이렇게 즐기면 좋습니다.
첫째, 포장을 열고 뿜어 나오는 동장윤다의 향을 코끝으로 깊게 들이마십니다.
둘째, 취향에 따라 차를 도구에 담아 적당히 우려낸 뒤 나오는 색깔을 관찰합니다. 홍차와 비슷한 색이 나거나, 백차 같은 색이 나온다면 다시 시도해 보세요. 동장윤다는 황금빛 노란색이 기본입니다.
셋째, 우려낸 동장윤다의 향을 맡습니다. 차의 표면에 코를 대어 맡지 말고 보듬이의 굴곡진 안쪽 면을 타고 흐르는 향을 맡으면 더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넷째, 맛을 즐기는 첫인상이 있습니다. 가장 첫맛에 집중해 보세요.
다섯째, 첫인상을 뒤따르며 쭉 끝까지 이어지는 중간맛을 즐겨보세요.
여섯째, 목 넘김의 부드러움과 편안함을 느껴보세요.
일곱째, 마치 스피릿(spirit)류처럼 목 넘김 이후, 목구멍을 따라 코와 입안으로 흘러 올라오는 끝맛을 음미해보세요.
여덟째, 모두 마시고 난 후 빈 보듬이의 표면을 감싸 돌고 있는 동장윤다의 잔향을 즐기십시오.
넷,
동장윤다는 늘 그렇듯, 한 장 한 장 손으로 접어 만든 한지 봉투에 담고, 차 맛과 향이 변질되지 않게끔 밀봉 포장한 다음, 찻잎이 쉬이 부서지지 않게 종이 상자에 담았습니다. 동장윤다도 여러 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에 담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동장윤다의 특성상 밀봉 포장을 고수합니다. 차를 다 마신 다음 버리는 빈 용기가 아니라, 정성껏 만든 차를 더 많은 분께 전하기 위한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2021년 동장윤다의 라벨 디자인은 곱게 모은 두 손을 본떴습니다. 보기에 따라 보듬이를 쥐는 차인의 두 손일 수도 있고, 차나무 잎을 한 움큼 모은 농부의 손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려 손을 모으려는 어떤 이의 손일지도 모릅니다. 모은 두 손은 공손하고 정갈한 몸가짐이기도 하고, 가진 것이 있든 없든 당신에게 정성을 다해 건네는 마음가짐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동장윤다 맛을 선으로 표현한다면 맛의 결이 고르게 쌓여 전체적으로 모난 데 없는 둥근 원과 같겠지요. 두 손에 맛의 동그라미가 살포시 올라가도 좋겠습니다.
다섯,
새벽, 차가 익어가는 발효실 앞에 앉아 잠시 땀을 씻으며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동장윤다의 맛이란, 글로 쓰고 지도로 그려낼 수 없는 신비한 영역에 걸쳐 있는 게 아닐까.
차 맛의 바탕이 되는 차나무 잎의 한해살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몫이라, 매년 걱정과 설렘이 오가는 마음으로 찻일을 시작합니다. 농부가 낮 동안 거둬들인 잎을 다음 날까지 일정한 상태로 숙성 완료하는 빠듯한 수작업 일정은 몸을 고단하게 하고요. 열흘 동안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만들고 나면 한 톨의 후회도 남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따라 차차 깨어나는 동장윤다의 맛과 향을 기다리며 결국 동장윤다를 완성하는 일 역시 사람의 몫이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어렵고, 어려워서 매력적인 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마무리하며,
동장윤다를 그저 한 통의 차가 아니라, 역사를 되짚고 청사진을 그리는 차살림 차문화 운동의 한 부분으로 깊이 이해하고 즐겨주시는 당신께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척박한 때일수록 그다음 단계를 제시하고 한계의 벽을 조금씩 뚫어내는 사람들의 노력도 필요한 법이겠지요. 동장윤다와 함께 해주시는 그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תגובו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