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다헌 밥상_먹는 대로 삶이 흐른다 04
마을 뒷산에 차 마실 샘물을 뜨러 간다. 풍년화가 좁쌀처럼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지 한 달째. 매실나무, 복숭아나무에도 꽃이 흐드러졌다. 볕이 잘 드는 밭둑, 흙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에는 쑥이 돋았다. 바람에 쑥 향기가 실려 온다. 아버지와 내가 물을 긷는 사이 어머니는 쑥을 한 줌 캐신다. 어깨와 등으로 햇볕이 따끈따끈 내려앉는다. 쑥 향기와 봄볕에 가만히 가슴이 설렌다. 산에서 내려오며 점심에는 쑥을 넣어 죽을 끓여 먹기로 한다. 쑥 넣은 죽 한 그릇, 부지깽이나물 무침, 배추김치, 간장 한 종지. 봄날의 점심이다. 어머니는 갓 캐온 쑥을 날콩가루에 버무려 쌀과 기장으로 끓인 죽에 넣고 한 김 익히셨다. 보기만 해도 기운이 솟는 섬쑥부쟁이 어린 순을 꺾어 데친 다음, 간장으로 바락바락 무친 부지깽이나물은 맛도 향도 최고다. 지난겨울 김장김치는 너무 맵지도 너무 짜지도 않아 양껏 먹어도 좋다. 여기에 해묵은 간장을 곁들인다. 취향껏 죽에 끼얹어 쓱쓱 비벼 먹는 것이다. 싱그러운 점심을 먹으며 겨우 내 새로 일군 밭에는 콩을 심기로 뜻을 모은다.
메주로 장을 담그고서 한 절기가 지나는 봄날, 나는 밭에 콩을 심는 일에서부터 잘 숙성된 간장을 식탁에서 만나기까지를 떠올린다.
삽으로 흙을 깊이 갈아엎어 장만한 밭에 콩 씨를 뿌리는 일은 동다헌 텃밭 봄 농사를 시작하는 출발점과 같다. 콩은 땅심을 키워주며, 큰 보살핌 없이도 별 탈 없이 쑥쑥 잘 자라기 마련이다. 여름 지나 이른 가을, 추수철이 돌아오면 거둬들인 콩을 볕에 여러 날 말렸다가 콩 타작을 한다. 튼실하고 알이 고른 콩알들만 골라 서늘한 곳에 보관해둔다. 매년 동짓달이 되면 콩을 삶고 메주를 쑨다. 그 메주가 다시 발효를 거쳐 간장이 된다.
한 단락으로 줄여 쓴 여정은 한 해를 꼬박 거쳐 완성된다. 작년 콩 심던 날의 일이나 그즈음 동다헌 텃밭의 분위기가 생생히 기억난다. 얼마 전 장 담그던 날 날씨와 부모님과 나눈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오늘 점심상에 오른 모든 음식에 양념이 된 간장은 그 여정의 결과물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일종의 물체, 식품 그 이상이다.
간장은 한식 요리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양념이다. 국물 요리나 나물 반찬, 김치 류 음식을 할 때 간을 맞추고 맛을 돋우기 위해 넣는다. 단지 짠맛이 필요하다면 소금으로도 충분하지만, 간장에는 소금으로 낼 수 없는 감칠맛과 풍미가 있다. 간장 고유의 감칠맛과 풍미는 발효 과정에서 생긴다. 그렇다 보니 옛날 어머니들의 부엌 살림살이에서 장 담그기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장 담그기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해오셨고, 나는 어릴 적부터 그 모습을 보아왔다. 그런데도 어린 내게 장 담그기 혹은 간장이나 된장은 어머니가 고생스레 만드시는 무언가 일 뿐이었다. 어머니 음식은 늘 맛있으니 간장이 맛있다는 사실도 대단할 것이 없었다. 더 자라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머니 표 간장은 마트 식품 매대에서 살 수 있는 간장과는 다른, 좀 특별한 식재료 정도로 여겼다. 그나마도 음식을 할 때나 한번 씩 잠깐 떠올려볼 뿐이었다. 세월이 지나 동다헌 가까이 내려와 지내기 시작하고서야 늘 보던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콩이 간장으로 변하는 연금술 같은 신기한 과정을 직접 경험하는 일은 값지다. 우선, 간장을 직접 만들어 먹는 일은 흔하지 않다. 어떤 종류의 간장이든 대형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 그런데도 손이 여러 번 가고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간장을 직접 담근다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다. 물론 나는 그 수고로움을 오롯이 감당하지 않으면서 어머니 곁에서 그 과정을 직접 겪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실용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장 담그기에서 무척 쓸모 있는 것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일 년에 걸쳐 복잡하고 섬세한 절차에 따라 음식을 만들어 보고 나면, 매일 하루 한 끼 정도 내 집 주방에서 요리하는 일이 훨씬 덜 번거롭게 느껴진다. 피식 웃음이 나올 만한 사소한 얘기일 수 있지만, 이런 태도의 변화는 더 큰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된다.
더구나 장 담그기의 경험,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진 생각은 그저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았던 간장을 이런저런 관계 속에 놓인 특별한 무엇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누구나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욕구를 가장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전문가일 거라고 흔히 생각한다. 텔레비전에는 유명한 요리사가 나와 다양한 먹을거리를 요리해 보인다. 사람들은 그 요리사가 운영한다는 식당에 줄을 서고, 또 다른 스타 요리사의 얼굴이 인쇄된 레토르트 식품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면서 그 외에 다른 모든 일은 나보다 더 잘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 나의 만족스러운 한 끼는 유명 맛집과 식품 회사에! 언뜻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슬로건 같은 이 생각을 곱씹어 본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번거로움을 무릅쓰지 않는 것, 혹은 더 그렇게 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누구일까.
혹시 이 모든 일을 대신해주고 싶어 하는 기업들이 아닐까. 콩은 자라면서 자신이 뿌리내린 땅의 힘을 길러주는 식물이다. 콩노굿은 하얗고, 콩 대와 잎은 말리면 좋은 불쏘시개가 되고, 썩히면 좋은 거름이 된다. 콩은 콩이 솥 바닥에 눌어붙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물만으로 삶아야 메주 맛이 진하다. 메주를 띄울 때는 가을 추수할 때 챙겨둔 볏짚이 필요하고, 흰 곰팡이 꽃이 활짝 필 때까지 띄워야 한다. 장을 담글 때는 메주 표면에 곰팡이를 잘 씻어내어야 쓴맛이 나지 않고, 장 담그는 장독은 볕 바른 데 놓아야 한다. 이 과정을 차례차례 경험하는 일은 내게 알려준다. 간장 한 그릇에는 흙과 공기, 볕과 바람과 같은 자연 속의 관계가 엮이어 있다. 콩 농사를 짓는 농부, 소금을 채취하는 어부, 장독을 빚고 굽는 사기장의 손길도 닿아 있다. 무엇보다 직접 소매를 걷어 올리고 콩을 씻고 메주를 토닥거리며 빚어보기 전에는 번거롭고 어렵게만 보이는 장 담그기가 생각보다 훨씬 즐겁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니 간장 한 종지에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즐거움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 요리하면서 여가를 보내는 일의 기쁨도 담겨 있다. 이 기쁨을 위해 주방에 서는 일은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는 매체나 기업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복잡하든 간단하든 음식을 직접 만드는 것. 그것은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더 잘하리라는 생각, 진정한 여가란 오직 소비라는 무기력한 생각을 거부하는 출발점이다. 좀 거창한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는다.
당장 간장을 담그리라 마음먹기는 어렵다. 그러나 봄 쑥 한 움큼을 손에 쥐고 주방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쑥 향기를 음미하고 보드라운 잎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쑥 넣은 죽을 한 솥 끓이는 일은 기대보다 훨씬 즐거울 거다. 간장 한 숟가락 끼얹어 쓱쓱 비빈 죽을 한 그릇 먹고 나면, 아, 봄이구나, 춘분이구나. 몸도 마음도 기꺼우리라.
음식 재료 손질과 조리, 그릇에 담기 _ 조 정 연 글과 사진 _ 정 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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