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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수고로움을 벗 삼아 만든 음식을 먹으며 산다는 것_묵나물, 지난 해 봄과 가을을 접시에 담다


동다헌 밥상_먹는 대로 삶이 흐른다 02










정월 대보름에 먹는 아홉 가지 묵나물.










부엌에 들어서니 가지가지 마른 나물이 광주리에 담겨 있다. 갈색, 노란색 실타래처럼 색이 곱다. 가무레한 아주까리잎, 거머누릿한 것은 취, 부지깽이나물은 가마노르께하다. 노르불그레한 고사리, 누르푸름한 무시래기, 토란대는 누르스름하고, 고구마 줄기는 노르스름하다. 박은 누릇하고 애호박은 노르께하다. 한 데 모아 놓고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들과 밭으로 쏟아져 내린 볕 떨기를 정성껏 주워 담아 놓은 듯하다. 색상표에 갈색 카테고리를 주르륵 펼쳐놓는다 한들 이처럼 근사할까.


그림 감상하듯 뒷짐 지고 있는 나의 등 뒤로 어머니께서 들어오신다. 그제야 부엌에는 생기가 돈다. 고구마 줄기, 고사리, 무시래기, 박, 부지깽이나물, 아주까리잎, 애호박, 취, 토란대 아홉 가지 말린 나물은 정월 대보름에 먹는 묵나물의 재료다. 어머니는 마른 나물을 종류별로 삶고 물에 불리고 다듬기 시작하신다.


아홉 가지 마른 나물은 제각각 질긴 정도, 고유한 향이나 식감에 맞춰 불리는 시간과 삶는 시간을 달리해야 한다. 고사리나 무시래기는 푹 삶은 다음 하루나 하루 반 정도 물에 불려 둔다. 특히 무시래기는 불린 다음 겉껍질을 벗겨내야 씹히는 맛이 좋다. 반면, 올해 취나 부지깽이는 부드러워서 여느 때보다 짧은 시간 삶고 불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묵나물 재료는 준비하는 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사나흘 정도 걸린다. 밭에서 갓 거둬들여 싱싱할 때 조리해야 더 맛있는 나물 반찬과는 사뭇 다르다.


동다헌 겨울 밥상에는 종종 묵나물이 오른다. 채식하는 집에서 나물은 밥반찬으로 으뜸인데, 푸성귀를 직접 키우고 캐 먹기 어려운 겨울에는 말려둔 나물로 나물 반찬을 만든다. 지난 해 봄과 가을에 밭이나 들에서 거둬들인 푸성귀를 말려 두었다 햇나물이 나기 전에 무쳐 먹는 것이다. 이를테면, 취나 부지깽이는 봄철 내내 끊어서 나물 반찬이나 국거리로 삼고, 입하 전에 마저 꺾어서 삶고 말려둔 것이다.


아버지는 여러 해 시간을 들여 뒤뜰 편백 숲에 취나물 밭과 쑥부쟁이 밭을 일구셨다. 편백 그늘은 취와 쑥부쟁이 잎이 강한 햇볕에 상하지 않고 잘 자라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매일 이른 아침에 취와 쑥부쟁이를 꺾고 다듬어 나물을 무치셨다. 아침 부엌에서 무친 나물은 그날 하루 끼니 반찬으로 삼는다. 입과 줄기가 세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일일이 꺾고 삶고 말려 보관한다. 삶은 취와 쑥부쟁이 나물은 적당한 볕과 바람을 쐐 가며 말리는데, 여러 날이 걸린다. 커다란 발을 가득 채우던 삶은 나물이 잘 마르고 나면 한 소쿠리 정도로 준다. 어머니는 다 마른 나물을 정갈히 모아 속이 훤히 보이는 통에 담아 부엌 시렁에 올려두신다. 겨울 채비이자 정월 보름날이나 설날 차례상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묵나물을 준비하는 데는 사나흘이 아니라 해를 넘기는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동다헌 부엌을 나서면, 마음먹기에 따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먹거리가 흔하다. 대형할인점 채소 판매대에 가면 요리책에서나 보던 서양 허브에서부터 정월 대보름용 갖가지 마른 나물이 진열대에 늘어서 있다. 뭐든 그저 먹으면 되지, 먹는 게 무슨 대수라고 여기는 삶의 태도에도 ‘소박한 밥상’이라는 포장지로 감싼 간편한 먹거리가 놓여 있다. 

사람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동다헌 밥상은 수고로움을 벗 삼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차려진다. 아직도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 생각하기 일쑤인 나는 종종 동다헌 텃밭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밥상 차리기가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나 정신으로 이름 부르는 그 무엇을 위한 수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밥과 국과 두세 가지 반찬이 오르는 간소한 한 끼 밥상을 차리려고 매일 밭에 나가 채소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쫓는 것. 잔뜩 만들어 쟁여 두지 않으며, 하루 먹을 만큼만 꺾고 캐서 먹되 남겨 버리지 않는 것. 누군가에게는 대단치 않아 보일지 몰라도, 매일 먹기 위해 매일 그 일을 미루지 않고 해내는 걸 곁에서 지켜보는 내게는 평범하지 않다.


묵나물 거리를 모아둔 부엌에서 일 년 치 햇볕을 머금은 양 고운 색이 어우러지는 광경을 보다가 떠올린다. 지난봄과 여름과 가을의 텃밭과 부엌의 살림살이를.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변함없던 노동의 순간순간을. 맛깔스러운 묵나물을 반찬 삼아 아침을 먹으며 생각한다. 해마다 겨울을 나고 봄을 기다리는 동다헌 어머니의 부엌 시렁에는 가지가지 말린 나물이 놓여 있고, 삶은 먹는 대로 흐른다. 의심 많은 나는 묻는다. 정말 그럴까? 아마 그럴 것 같다.










마른 나물을 한 데 담으니 맛있게 누르스름한 해 같기도 하고 풍성한 보름달 같기도 하다.










[동다헌 밥상 두 번째 레시피_묵나물 무침]

정월 대보름에 먹는 아홉 가지 혹은 열 가지 묵나물 재료는 지역마다 다르다. 동다헌에서는 보통 가지, 고구마 줄기, 고사리, 무시래기, 박, 부지깽이나물, 아주까리이파리, 애호박, 취, 토란대를 말려서 보관해 두었다가 무친다.

묵나물 요리는 우선 마른 나물을 물에 푹 삶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냄비에 헹군 마른 나물을 넣고, 나물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 삶는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서 더 삶는다. 푸성귀를 데치는 것보다 긴 시간 동안 충분히 삶아야 먹기에 좋다. 질긴 것은 더 삶고 덜 질긴 것은 덜 삶고. 중간중간 무르기를 점검해보는 것이 좋다. 다 삶은 나물은 삶은 냄비 그대로 식히면서 불린다. 완전히 식으면 찻물에 씻은 후 다시 나물 상태에 맞춰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삶고 불리는 과정 때문에 묵나물은 여러 날에 걸쳐 만들어야 하는 음식이다.

충분히 삶고 불려 적당히 말캉해진 나물을 건져 내어 물기를 꼭 짜낸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묵나물은 칼이나 가위를 대지 않고 길쭉한 나물 모양 그대로 요리한다. 기다란 모양의 음식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먹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풍습 같은 것이리라. 평소에도 어머니는 나물이나 푸성귀, 열매의 결을 따라 손으로 뜯고 끊어서 요리하는 것을 즐기신다. 칼로 싹둑싹둑 썰어낸 나물의 식감은 결을 살려 적당히 손으로 끊어 조리한 나물의 식감과 다르다.

널찍하고 바닥이 깊은 냄비를 불에 올리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린 나물을 덖는다. 보통 들기름을 사용하지만, 어머니의 묵나물 비법 중 한 가지는 올리브유와 들기름을 일 대 이 비율로 섞어 덖는 것이다. 마른 나물 고유의 구수함과 들기름의 고소함, 신선한 올리브유의 풍미는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우러진다. 나물이 냄비 안에서 따뜻하게 데워지기 시작하면 간장을 둘러 나물에 고루 스며들게 한다. 좀 더 덖다가 들깻가루를 한 숟가락 넣고 계속 더 덖는다. 나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게끔 뜨끈히 덖고 나면 불을 끄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뿌린다. 한 김 식힌다. 그런 다음 한 번 더 양념이 나물에 푹 배이게끔 손으로 버무려야 한다.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조몰락조몰락 나물을 무치는 것. 이것이 다른 한 가지 비법이다. 나무젓가락이나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서는 맛있는 나물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는 나물 표면에 양념이 적당히 묻는 정도로 그치기 때문이다. 손맛으로 나물 간을 마무리하는 것. 이것은 묵나물뿐 아니라 간장을 넣어 무치는 어떤 나물 반찬이든 한결 더 맛깔나게 하는 비법이라는 걸 기억해두시라.  










음식 재료 손질과 조리, 그릇에 담기 _ 조 정 연

글과 사진 _ 정 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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